지승학 / 영화평론가

[실화와 영화] ③ 불안공화국 대한민국

  실화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 중 두드러지는 장르는 바로 ‘범죄영화’ 장르인데, 특히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하는 서사들이 주를 이룬다. 흔히 우리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하는 영화의 공간을 한국 사회에 대한 은유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영화 현상을 구성원들이 불안을 느끼게 만드는 한국의 사회구조에서 비롯된 증상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


‘페이크 다큐’가 현실을 포착하는 법칙


지승학 / 영화평론가

 

 
 

  맞다. 영화로 치자면 한국 사회자체가 ‘페이크 다큐(Fake Documentary)’다. 페이크 다큐는 놀람의 극치를 보여주는 영화로 소비된다. 그래서인지 이 장르가 포착하는 대상은 초자연적이거나 설명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렇다고 하우스 호러나 엑소시스트 혹은 고어 영화처럼 페이크임을 대놓고 드러내가며 쇼크를 주기만하는 것은 아니다. 이 장르는 ‘불안’을 모으기 때문이다. 불안을 모으다 보니 공포도 동반된다. 물론 불안과 공포가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같은지를 설명하긴 쉽지 않다. 불안에는 종류가 많고 공포 역시 그렇기 때문이다.

  ‘페이크 다큐’가 불안을 유발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불안해하는가를 생각하기 쉽지만, 그보다는 ‘왜’ 불안해하는가라는 의문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페이크 다큐는 ‘무엇’에 해당하는 마지막 결론만큼은 언제나 명확하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분명 페이크 다큐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정답에 접근해 갈 때 극에 달하는 것 같다. 그 정답은 늘 확실한 마침표를 찍는데 그 마침표는 ‘죽음’이다.
 

죽음에 대한 베리떼, 페이크, 불안, 그리고 영화


  베리떼(Verite, 진실)는 ‘보도’를 떠나 ‘영화’도 추구하는 절대적인 이데아다. 보도와 영화 둘 모두가 추구하는 그 이데아 축에는 항상 ‘카메라’가 놓인다. 카메라는 운명적으로 베리떼와 가까워 보이지만 페이크 역시 가까이한다. 양극단을 맞닿아 두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베리떼인지 페이크인지를 구분하는 경향은 카메라만의 특권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CCTV 화면처럼 사실 왜곡이 없다고 믿는 카메라가 갑자기 사라지는 사람을 포착하면 베리떼인가 페이크인가. 바로 이 이상한 혼동은 불안한 상황을 만든다. ‘페이크’가 ‘베리떼’로 흡수되거나 그 역이 발생하는 것. 불안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 불안을 모으는 ‘페이크 다큐’는 바로 진실과 가짜 사이에서 발생하는 전염현상의 불안 속에서 성장한다.

  그런 불안의 진원지. 다시 말해 진실과 가짜를 뒤섞는 카메라의 특권, 카메라의 강력한 이 힘은 한국의 시대상과 인물들을 모두 포섭한다. 페이크 다큐 장르는 아니지만, 같은 문법으로 해석할 수 있는 영화로는 우선 <살인의 추억>을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1980년대 무능했던 공권력이 만들어낸 현실을 강렬한 매너리즘적 시각으로 그려냈다. 영화 <군함도>는 역사적 사실에 헐리웃 영화의 과장문법을 과감하게 묻혀놓기도 했고, 시대적 인물을 그린 <변호인> <대장 김창수> <박열> <동주> 등도 있다. 시대의 참극을 반영한 <화려한 휴가> <26년> <택시운전사> <1987> 등도 마찬가지로 진실과 가짜의 버무림으로 현실을 보여준다. <범죄도시>와 같은 유려한 명작도 사실은 다큐멘터리 연출자 출신인 강윤성 감독이 진실과 가짜의 적절한 균형을 통해 한국 사회를 정교하게 조준했기에 가능했다. 이를 페이크 다큐의 문법대로 정리하자면, 다시 말해 베리떼를 페이크로, 페이크를 베리떼로 위장시키는 그 이중화법의 위력에 빗대어 말하자면, 그 강력한 메시지는 결국 ‘죽음’의 의미, ‘사라짐’의 미학으로 향하게 될 때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들 속에는 알 수 없는 ‘불안’이 서려 있다. 그것은 공포와 짝을 이루기도 하고 허무와 짝을 이루기도 한다.

영화 <곤지암> 스틸컷 [출처: Daum 영화]
영화 <곤지암> 스틸컷 [출처: Daum 영화]

  이를 확인해보기 위해 다시 페이크 다큐로 돌아가 보자. 사실 페이크 다큐는 다른 말로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라고 하는데, ‘발견된 영상’이라는 뜻 속에는 이미 촬영자가 사라졌거나 죽었다는 것이 전제돼 있다. 페이크 다큐는 카메라가 운명적으로 저지른 ‘불안’과 그 불안 끝에 찾아오는 ‘죽음’이라는 강력한 마침표를 알아서 찍는 상황을 만들고, 그것은 결국 페이크 다큐의 내면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불안을 유발하는 카메라의 특성을 이해하게 되면 ‘무엇’이라는 질문보다 ‘왜’라는 질문이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왜’라는 질문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아마 그것은 영화 속에서는 영원히 보이지 않는 존재로 남는 ‘카메라’라는 장치가 바로 불안과 공포의 진원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불안을 향해 던지는 ‘왜’라는 질문은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한 공허한 질문과 다르지 않게 된다. 공허가 불안과 공포를 낳은 걸까. 분명한 건 불안과 공포는 카메라를 통해 결국 한 몸처럼 나타난다는 것이다. 불안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이 페이크 다큐인 한, 우리가 불안과 공포를 함께 안고 가야 하는 것이다.


페이크 다큐 대한민국의 불안, 영화 <곤지암>


  카메라에 포착된, 그러니까 베리떼와 페이크가 서로를 흉내 내는 일련의 대한민국의 한 단면들은 그것이 영화의 재현이든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이든 불안과 공포를 유발하는 페이크 다큐가 될 수밖에 없다. 저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우리의 눈을 의심해야 했던,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수많은 일들을 겪어 온 우리로서는 대한민국이 페이크 다큐 영화처럼 되어갔던 수 년 간의 불안과 공포를 그대로 감내해야만 했던 것이다.

영화 <곤지암> 스틸컷 [출처: Daum 영화]
영화 <곤지암> 스틸컷 [출처: Daum 영화]

  최근에 개봉된 영화 <곤지암>의 성공은 대한민국의 불안을 그렇게 포착한데서 비롯됐다. 시대 배경이 1979년이고 그 곳의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우리를 옥죄어 오는 ‘불안’ 그 자체를 보여준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확실히 봤어”라거나 “분명히 이 방향이 맞다”는 식의 절규를 해도 카메라는 진실인지 가짜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모두가 사라질 것이라는 암시만 잔뜩 깔아 놓는다. 그렇게 카메라는 확실하다고 생각한 방향으로 가면 갈수록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면치 못한다는 불안과 공포만을 깨닫게 해준다.

  이것이 파운드 푸티지, 페이크 다큐가 갖는 일반문법이고 강력한 메시지다. 모든 영화에 적용될 수는 없겠지만 카메라로 포착한 상황이 진실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 바로 이것이 우리 현실의 모습인 것이다. 현실 역시 진실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는 한, 카메라는 ‘있는 그대로’를 포착한다는 말이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진실과 거짓을 혼란케 하는 페이크 다큐가 보여주는 이러한 세상의 법칙. 사실 그 법칙은 진실이 가짜일지 모른다고 의심할 때만, 가짜가 진실일지 모른다고 의심할 때만 그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게라도 해야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칙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어쨌든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영화건 현실이건 페이크 다큐의 문법대로 베리떼와 페이크의 흉내 내기를 일삼아 오늘도 그 불안과 공포를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떼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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