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그리고 해외 입양]

 

입양의 역사

(출처: 픽사베이) 
(출처: 픽사베이) 

  입양의 역사는 가족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족 구성원을 늘림으로써 노동력을 확보하거나 가계 계승을 목적으로 양자를 들인 사례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에서의 입양, 즉 요보호아동의 복지 차원에서 제도적 장치로 입양이 자리 잡은 것은 근대국가가 형성된 이후부터이다. 특히 국경을 넘어선 입양의 역사는 불과 80년이 채 되지 않았다.

  한국은 그런 해외 입양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해 왔다. 애초 해외 입양 자체가 한국 전쟁으로 생겨난 고아와 미아에 관한 구제책으로써 본격 시작됐으며,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해외 입양아를 보내는 국가였다. 그리고 한국은 상당한 경제 성장을 이룬 후에도 여전히 많은 아이를 국외로 입양 보내고 있는 이례적인 국가이다. 세계 국제 입양 통계를 집계하는 기관인 ISS(International Social Service)에 따르면 2020년을 기준으로 한국의 해외 입양 규모는 콜롬비아(387명)와 우크라이나(277명)에 이어 전세계 3위를 기록했다.

  해외 입양은 당사자인 주체의 의사가 배제된 채 입양 단체와 국가의 개입에 의해 결과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타자 간의 거래에 따른 아동의 이주’라는 특이점이 있다. 불과 20년 전까지 국내의 입양기관들은 입양국의 규정에 맞춰 합법적 서류를 구비하기 위해 허위 정보를 기록해 아이들을 ‘법적 고아’로 만드는 등 여러 사회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이번 포커스 기획을 통해 한국의 해외 입양 전개 과정을 알아보고, 나아가 세심한 입양제도 설계의 필요성을 환기해보고자 한다.
 

한국 전쟁: 해외 입양을 낳다(1950~1970)
 

  입양은 가족 구성원이 필요한 성인과 보호자가 필요한 아동을 잇는 제도로써, 친부모가 아동을 양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요보호아동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사회적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해외 입양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현대적 입양의 본래 목적인 요보호아동의 복리와는 무관하게 국가의 사회적 비용 절감을 목적으로 입양 제도가 운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본격적인 해외 입양은 초대 정권인 이승만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됐다. 이른바 ‘원 피플 원 블러드’ 정책에 의해서였다. 당시 미군과 한국인 사이의 혼혈아를 미국에 입양보내는 것이 최고의 복지 사업처럼 치켜세워졌다. 중앙입양원에 따르면, 1955년부터 1961년까지 4,185명의 혼혈아동이 해외 입양됐으며, 이들 중 4,155명이 미국으로 입양됐다. ‘아버지의 나라로 돌려보낸다’라는 일국일민주의 신념에서 알 수 있듯 한국의 해외 입양은 그 시작부터가 순혈주의적 가부장제에 기반한 것이었다. 국가의 주요 국정과제가 개발과 성장에만 초점이 맞춰진 시점에서 ‘표준’을 벗어난 개인이 설 곳은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요보호아동을 위한 정책이 자국민 보호라는 국가의 최소 의무를 외면할 수 있게 하는 허울 좋은 명분이 돼버린 셈이다.

  표준적 질서 구축을 위한 해외 입양에 따른 병폐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국가가 정상적 삶의 범주를 규정함에 따라 그 규정 밖의 존재들, 즉 배제된 소수자가 형성되고 그들의 기본권 박탈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이로 인해 양육 의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동 긴급구호’라는 명분하에 모자(母子) 가정이 해체되기도 했으며, 심지어 민간 입양 기관을 통한 ‘대리입양’을 통해 입양 부모와 아동이 서로 얼굴조차 보지 않고 가족의 연을 맺기도 했다. 혼혈아동들이 가부장적 규범 내에서 사실상 강제 이주 됐다는 점에서 가히 ‘한인 디아스포라’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산업화: 입양 경쟁(1970~1990)
 

  한국은 경제적 성장을 이룩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출생 아동 100명당 1.3명을 다른 나라 가정으로 보냈다. 전후의 해외 입양이 혼혈아에 치중됐다면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차츰 비 혼혈아동으로 입양 대상자가 확대됐다. 특히 급격한 도시화 및 산업화 과정에서 ‘미혼모’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하며 혼인하지 않은 여성의 임신·출산에 대한 비난과 낙인이 발생했고, 1997년에는 외환위기로 인한 가족의 해체 등으로 결손가정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해결방안으로써 다시금 해외 입양이 떠올랐다. 해외 입양기관은 미혼모 상담사업을 통해 비 혼혈 아동의 해외 입양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무렵 미아가 고아로 둔갑 돼 단기간에 해외로 입양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혼혈아에서 비 혼혈아로, 그 양상은 달라졌지만 국가 주도의 산업화 정책하에 개인의 이익은 얼마든지 희생될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시대를 관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76년 제정된 입양특례법은 표면적으로는 국내 입양의 증진 전략을 취하고 있지만, 실상은 해외 입양 절차의 간소화를 견인하는 국가 차원의 전략이었다. 게다가 해외 입양이 외화획득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는데, 이를 겨냥하듯 1988년 미국의 월간지 <프로그레시브>는 한국이 아동 수출을 통해 200억 원에 달하는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기사를 내놓기도 했다. 같은 맥락으로, 이 시기 급증한 해외 입양의 원인을 국내 민간 입양기관들의 수수료 경쟁에서 찾기도 한다.

  한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낼 때마다 입양기관이 얻을 수 있는 고액의 수수료를 위해 자격미달의 양부모에게도 입양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해외 입양의 명목은 소위 정상 가족의 범주에서 자격을 갖춘 부모를 찾아준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아동을 상품화해 매매할 수 있다는 인식을 생기게 만든 것이었다.
 

지금: 해외 입양을 이야기하는 이유
 

  아동권리보장원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국내 전체 입양기관이 1,183명의 아동을 해외로 입양 보내며 받은 수수료는 총 221억 3천800만 원에 달한다. 아동 1명의 수수료가 약 1,871만 원인 셈이다. 입양기관은 수수료로 입양 절차에 따르는 비용을 충당한다는 입장이지만, 민간기관이 자체적으로 설정한 기준에 의해 수수료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무분별한 입양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작년 2월 국가인권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한인 입양인 3명 중 1명이 ‘학대’를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8명 중 1명은 ‘성적 학대’를 토로하기도 했다. 주요 원인은 ‘대리입양’ 제도였다. 해당 제도를 통하면 양부모는 직접 한국에 올 필요 없이, 입양기관으로부터 마치 ‘배달품’을 수령하듯 아동을 인계받을 수 있었다.

  물론 해외 입양과 관련해 유의미한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2012년 개정 입양특례법이 시행됨에 따라 민간기관이 좌우하던 한국 해외 입양을 가정법원이 허가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또한 무분별한 해외 입양을 야기했던 ‘대리입양’ 제도 역시 2011년에 들어서면서 사라지게 됐다. 그러나 요보호아동의 복리를 위한 정책이라는 애초 목적과는 달리 혼혈아동과 미혼모의 자녀만을 대상으로 해외 입양이 이뤄진 원인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아기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결코 떨쳐낼 수 없을 것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해외 입양아 가운데 미혼모 아동이 차지하는 비율은 2018년 99.7%, 2019년 100%, 2020년 99.6%에 달했다. 최근에는 이혼과 재혼으로 만들어진 ‘비정상적’ 가족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해외 입양의 범주가 확대되고 있다. 이런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에서 입양은 결함이 있는 존재를 해외로 송출하거나 ‘정상’ 구성원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은 2023년 OECD 경제 성적 2위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매해 300여 명의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내는 나라이다. 이 모순된 양상을 향한 경종은 계속해서 울려져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는 여전히 미혼모의 자녀, 혼외자식 등 소위 ‘규격’을 벗어난 이들을 보듬지 못하고 있으며, 외면받은 아이들은 해외 입양이라는 방식을 통해 내쳐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상’ 범주 밖에 놓여 호명되지 못한 수많은 이들이 실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정상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소수의 목소리를 수용할 수 있는 열린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