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일 / 영화평론가

[문화_실화와 영화]

  최근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늘고 있다. 실화 기반 영화의 증가는 대중들이 실화로부터 보고 싶어 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문화면에서는 대중들이 이른바 팩션(fact/fiction)영화에 주목하는 현상에 대해 살펴보고, 그 의미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팩트와 픽션 사이 ② 애국과 국뽕 ③ 불안공화국 대한민국 ④ 역사를 바꾼 평범한 영웅들

사실에서 사건으로

심우일 / 영화평론가

  살다보면 사실과 허구가 구분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보았던 일들이 내게도 일어나는 순간 말이다. 생전 남에게만 일어날 것 같던 교통사고 덕분에, 죽음을 체감했던 경험이 일례가 될 수 있을까. 차선을 넘어 주행하던 트럭과 충돌한 자동차 내부의 유리창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져나가며 몸을 덮쳤을 때 “아, 남들도 이런 기분과 함께 세상을 떠났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앞서 떠난 망자들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의 경험은 나에게 ‘나’라는 존재의 죽음이 남과 평등하다는 것을 알려줬고, 허구란 거짓이 아니라 일상화돼 뒤로 물러선 잠재된 실재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현실이 예술을 모방한다

  어떤 영화평론가들은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과대망상 환자의 허무맹랑한 선언 같기도 하지만 앞서의 경험 덕분에 문장을 곱씹다보면 비의를 알아차릴 것도 같다. 여기서 나에게 질문에 대한 해답을 기대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필자도 요령부득이니까. 다만 이쯤에서 한 명의 작가를 언급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학원 시절 오스카 와일드(O.Wilde)의 문집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중에서 아직도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문장이 있는데, “예술이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예술을 모방한다”는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사실주의 문학의 대가인 발자크(H.Balzac)의 소설에서 아름다움이란 작품의 사실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해 창조된 세계의 심도(深度)라는 분석을 내놓은 바가 있다. 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발자크 문학에 대한 평가에 동의한다.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1835)이 아무리 프랑스 사회의 단면을 생생하게 묘사한다고 해도 세계는 완료될 수 없는 물자체로 남겨지기 때문이다. 총체적 세계의 전체상은 언제나 우리의 의식에 비춰 주어질 뿐, 완료되지 않은 불가능성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다.

  예술에서 세계는 ‘있어야 하는 세계’ 혹은 ‘존재할지 모르는 세계’를 그린다. 더 정확히는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세계’를 그린다. 우리가 말하는 어떤 작품의 사실성이란 이런 믿음 속에서만 지속 가능하다. 그럼에도 세계는 이미지로 존재한다. 따지고 보면 굳이 예술이 아니더라도 삶이 이뤄지는 현실 세계도 시각적 이미지들의 분절된 단면들의 연속적인 운동이지 않나. 이렇게 생각하면 영화평론가들이 세상은 언젠가 영화가 될 것이라고 떠드는 것이 허무맹랑한 선언은 아니리라.

사실과 기억의 문제

  이제 실화와 영화에 관해 말해볼까. 실화란 무엇인가. 과거의 한 시점에 일어난 실제의 사건이다. 반면 영화는 실화를 소재로 하더라도 내부에 픽션(fiction)을 가미해 재구성한 가상의 몽타주이다. 영화는 실화와 근거리 역사를 다루는 한에서 사건과 연루되지만 과거 사건을 그 자체로 재현하지 못한다. 아니,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실화를 소재로 한 작품들에 더 몰입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가까이 실화를 소재로 제작된 작품들을 기억에서 더듬어보아도 <군함도>(2017), <택시운전사>(2017), <1987>(2017) 등이 있다. 나는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이 영화란 매체가 근본적으로 허구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는 물론 현실과 가상의 혼동을 유발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효과일 뿐이지 관객의 무지를 증명하지 않는다. 그럼 왜 실화 소재의 영화에 관객들은 더 관심을 보이는가.

  무수한 원인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사실과 기억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다.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의 입장에서 근본적인 것은 실화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소재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이것은 영화 제작이 사건의 해석을 욕망한다는 것을 뜻한다. 초점은 사건의 사실성이 아니라 진정성이 부여된 해석의 문제이다. 사건의 단순한 사실성을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 어떻게 관객 내면에 강도(强度)적 심도(深度)를 생산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작업이다.

 
 

  카메라는 단순히 사실을 순차적으로 관객의 망막에 인화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언제나 필름이 돌아가는 순간 스스로 욕망하며, 관객들에게 사실들의 ‘사건성’에 대한 감수성을 열어주고자 한다. 사실들은 해석돼 일정한 강도를 지닌 사건이 된다. 이 사건은 영화 속에 잠재된 세상을 통해 드러나지만 현실화될 가능성으로 충만한 어떤 세계이다.

  예컨대 최근 영화 <1987>이 관객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1987년이라는 시간을 회고적으로 재현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당시를 살아가던 시민들의 내부에 잠재된 혁명적 역량을 실재적 사건으로 현실화하는 데에 있다. 개인의 영웅주의나 조직화된 혁명의 낭만성이 아니라 분화된 시민들의 보이지 않는 공동체적 결속을 혁명적 현실화로 연결시키는 카메라의 욕망에 관객들이 동의한 것이다.

  즉 관객들은 <1987>의 사실성에 박수를 보낸 것이 아니라 재창조된 1987년의 기억이 빚어낸 세계상의 심도에 공감한 것이다. 당대 정치 상황의 현장성과 맞물리며 과거로 존재했으며, 지금 도래해야 하고, 다시 미래가 될 과거로서의 영화적 현실을 관객들이 욕망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무리일까. 현실이 영화(예술)를 참조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사건과 욕망의 변증법

  관객들은 일방적인 수용자가 아니다. 한 개인은 어디까지나 자기 삶의 경험과 기억의 내부에서 자신의 무의식을 구성하고 세계를 욕망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주관적 기억 내부에서 구성된 의미의 층위를 벗어나는 것에 저항하기도 한다. 국가, 민족, 인종, 젠더, 계급 등의 민감한 문제일수록 텍스트의 수용과 저항이라는 긴장이 뒤따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요구하고 자신의 욕망을 되돌려 받는다. 그리고 자기 욕망의 되돌려 받기가 실패하는 지점에서 단절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 단절은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개방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기존의 주체를 보존하고자 하는 불안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실화를 소재로 한 작품 또한 이 같은 긴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사실적 관계들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관객들이 납득할 수 있는 해석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내면에 깊이를 생산할 것인가에 대한 진정성 있는 태도야말로 관객들이 실화를 소재로 제작된 영화에 주목하게 만드는 힘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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