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우연구] 『좀비 서사와 새로운 주체성』 김형식 著 (2016, 문화연구학과 석사 논문)

  본 지면은 원우들의 학위 논문을 통해 중앙대 대학원에서 어떤 연구 성과가 있는지 소개하고, 다양한 학과의 관점을 교류하고자 기획되었다. 이번 특집호에서는 ‘파국 담론’의 연장선상에서 2016년에 나온 문화연구학과 김형식 원우의 《좀비서사와 새로운 주체성》이라는 논문을 살펴보며, ‘좀비’ 서사가 반영하는 현대사회의 불안과 공포, 새롭게 등장하는 저항의 양상과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저자 인터뷰]

'다중'의 형태로서의 포스트-밀레니엄 좀비
 

 

■ 왜 ‘좀비’라고 하는 주제에 관심을 두고 논문을 쓰게 되었나
   좀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새벽의 저주(잭 스나이더, 2004)>를 본 이후였다. 부모를 잡아먹는 딸과 인간을 뜯어먹기 위해 달려오는 좀비들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으며 한동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사실 좀비보다 더 강력하고 무서운 괴물은 많다. 하지만 ‘다른 괴물보다 좀비가 더 두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며 여기에 이른 것 같다.


■ 느린 좀비에서 뛰는 좀비로의 변화가 내포하는 의미를 좀 더 설명해 달라
   <28일 후>에서 처음 뛰기 시작한 좀비는 좀비에 대한 기존 관점을 뒤엎었다. 뛰는 좀비는 좀비를 한물간 괴물에서 현대적 괴물로 재탄생시켰으며, 좀비를 다시 유행시켰다. 하지만 로메로 감독은 뛰는 좀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좀비는 더욱 관념적 공포를 주어야 하는데, 뛰는 좀비는 말초적 공포만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느린 좀비와 마주쳤을 때, 좀비에 대한 처리는 그리 시급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몸을 잘 가누지 못하며 우스꽝스럽지만 열심히 다가오는 좀비의 모습은 애처롭고 위태롭다. 이는 좀비에 대한 망설임과 관찰을 통해서 주체-타자의 구분에 대해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지게 한다. 반면 뛰는 좀비는 그런 고민의 여지가 없다. 살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좀비를 제거해야하기에 좀비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을 할 수없다. 뛰는 좀비는 현대적 속도 감각에 맞추어 장르적 쾌감을 선사하며 심화된 파국의 공포를 반영하지만, 로메로의 진지한 의도에서는 멀어진 감이 있다.


■ ‘좀비’라는 캐릭터를 떠올릴 때 가장 큰 특징은 ‘떼’로 움직인다는 것 같다. 이것이 ‘포스트-밀레니엄 좀비’ 서사와는 어떻게 연결 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좀비는 다른 괴물에 비해 상대하기 어렵지 않다. 밀레니엄 좀비 역시 뛰기는 하지만 인간의 육체를 초월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좀비가 두려운 이유는 끝없이 몰려와 아무리 제거해도 그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이 의식적으로 무리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식욕이라는 강력하고 유일한 동인에 의해 먹이(인간)를 찾다 보니 그렇게 보일 뿐, 이들 사이에서 연대나 협력의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포스트-밀레니엄 좀비들은 자의식을 갖고 연대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신의 권익을 위한 투쟁이기도 하고 공동의 목적을 위한 협력이기도 하다. 이들은 단순히 파편화된 원자로서의 ‘떼’가 아닌 수평적 네트워크로 구성된 ‘다중’의 형태다.


■ 그렇다면 최근 연상호 감독의 영화 <부산행>과 애니메이션 <서울역>을 통해서 보는 한국의 좀비는 어떤 특징을 보이는가
   세계적 유행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좀비 장르의 변방국이었다. 그런 점에서 작년 <부산행>과 <서울역>의 흥행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비로소 좀비가 한국사회의 괴물로서 대중적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를 포스트-밀레니엄 좀비 서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물론 연상호는 노숙인으로 최초의 좀비를 설정함으로써 좀비를 사회 속 타자와 약자로 호명하고 있지만, 좀비는 여전히 달리고 있고 공포스러운 괴물로 제시될 뿐 그 안에서 소통이나 화해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 사회 내에서 밀레니엄 좀비 서사가 충분히 개진된 이후에야 비로소 포스트 서사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안혜숙 편집위원|ahs11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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