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분선 / 철학과 박사

원우연구: 『푸코의 배려 주체와 자기 배려의 윤리』 김분선 著 (2017, 철학과 박사 논문)

  본 지면은 원우들의 학위 논문을 통해 중앙대 대학원에서 어떤 연구 성과가 있는지 소개하고, 다양한 학과의 관점을 교류하고자 기획되었다. 이번 호에서는 2017년에 나온 철학과 김분선 원우의 학위 논문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연구]


성의 담론 속에서 발견한 ‘자기 배려 주체’


김분선 / 철학과 박사

  푸코(Michel Foucault)의 윤리학에 대한 해명은 책상머리 철학과의 결별을 꿈꾸는 새로운 시도이다. 우리는 책과 사유를 통해 윤리의 원칙들을 학습하면서, 지적인 유희 너머의 무엇에 공감했는가. ‘성(性)과 쾌락’을 다루는 푸코의 질문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윤리에 대한 비판이 담긴 사회적 단상은 필자가 보기에 두 가지로 축약된다. 하나는 지켜야 하는 규범, 그러나 나만 지키고 있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를 되묻게 하는 규범이다. 다른 하나는 현실에서 와닿지 않는 교과서 속의 해답이라는 것이다. 윤리에 대한 이러한 일상적 비판들은 윤리적 논의들이 담는 의미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는 아마도 교육의 장에서 학습했던 규범이 실제 사회에서 자신이 기대했던 방식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성과 인식으로만 점철된 주체가 내린 판단은 현실의 사건들 속에서 언제나 최선의 선을 제공하지 않는다. 또 단 한 번의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 정의로운 원칙주의자로 살아가기에 삶의 무게는 녹록치 않다. 그런데 필자는 역설적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는 불합리한 삶을 경험할 때, 비윤리적 현실을 목도할 때, 여지없이 분노한다. 스스로 윤리적 원칙에 예외란 없다고 합리화하면서 실제로는 그러지 못한 자신과 마주하게 될 때 상실감과 자괴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충돌하는 두 가지 양가적 상황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윤리적 삶을 교과서에서나 실현되는 교육학적 의미로 생각하면서 동시에 진정으로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참된 삶의 모습이 윤리적인 내용으로 구성되기를 희망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모순된 사유를 동시에 안고 살아가는 이유는 윤리의 이상과 허상이 삶의 간극을 통해 드러나게 되고, 또 그것을 극복할 수 없는 이론적 한계를 자기 삶을 통해 확인하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물음의 정점에서 푸코의 ‘배려 주체 윤리’와 마주하게 되었다.   
 

윤리 계보학에서 주체의 해석학으로의 전환


  ‘광인’ ‘소수자’ ‘권력과 지식’에 대한 논의로 사회적 문제를 도발했던 학자 미셸 푸코는 자신의 새로운 계보학적 연구 과제로 ‘성’의 문제를 다루고자 했다. 그의 연구 목표는 ‘사목 권력’의 계보를 드러내는 데 있었고, 푸코는 윤리적인 문제들이 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가정했다. 이런 연구의 방향성은 그가 《성의 역사》 1권 ‘앎의 의지’를 발표하던 시기의 자료들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푸코는 윤리의 계보학을 진행하면서 ‘권력과 윤리’의 연관성을 조명하고자 했던 초기의 연구 목적을 버리고 ‘배려 주체’의 문제로 연구의 방향을 전환한다. 푸코는 앞선 연구의 목표와는 다르게 1982년 강의에서, 자신은 인간의 실존적 삶 안에서 발견할 수 있던 윤리의 문제들을 드러내고자 한다고 밝힌다. 푸코의 사유의 전환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84년 최종 발간된 《성의 역사》 2권 ‘쾌락의 활용’, 《성의 역사》 3권 ‘자기 배려’를 통해서이다. 그는 《성의 역사》 2권과 3권에서 ‘인간’과 ‘배려 주체’ ‘자유에 대한 물음’에 관해 다룬다. 그는 이러한 문제들을 삶의 영역에서 확인하고자 ‘쾌락’ ‘사랑’ ‘가정 공동체’와 같은 문제들을 윤리 연구의 주제로 삼는다. 그렇다면 푸코가 연구의 방향을 권력과 윤리의 계보학에서 자기 배려의 윤리로 전환한 이유는 무엇인가. 푸코는 윤리와 성의 관계에 대한 탐구 속에서 전통 규범 윤리의 이론들이 간과하고 있던 다른 관점을 발견한 것인가.


  푸코는 ‘자기 배려’ 윤리의 목적을 두고 《성의 역사》 2권 ‘쾌락의 활용’ 서론 초입에서 윤리의 역사는 ‘성(性)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밝힌다. 푸코는 인간 누구에게나 주어진 성의 문제들이 사적인 갈등과 염려를 낳는 문제의 출발점이라 보았다. 성의 문제는 인간의 자연적 문제이지만 그것의 쾌락이 주는 크기에 비례하여 자신에 대한 염려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염려가 ‘나’라는 인간에 대한 자기 성찰을 유발하면서 나의 사회적 역할과 사적 욕구 사이에서 어떻게 성에 대한 쾌락을 실천해야 하는가의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성이라는 자연적 쾌락은 ‘자기’에게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자각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는 동성애, 이성애의 문제에도 동일하게 발생하며, 자신의 사랑에 대한 관념과 자유의 문제에 대한 고려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사랑과 자유의 문제를 내포한다. 이런 점에서 ‘성의 역사’는 자기 배려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타자 배려의 역사이기도 하다. 또 성과 사랑의 문제가 인간의 평생을 걸쳐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긴 삶을 주체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자제와 절제의 힘을 기르는 훈련이 필요하다. 푸코는 이러한 논점들을 통해 성의 역사, 성의 윤리, 자기 배려의 윤리를 완성하고자 했다. 


자기 배려 주체 윤리의 성립 가능성 


  필자의 논문은 푸코가 자신의 남은 시간을 바쳐 연구한 그의 후기 윤리 연구인 ‘배려 주체와 윤리적 인간’에 관한 논의를 재분석하는 데 역점을 둔다. 푸코의 후기 연구는 푸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푸코의 윤리학은 비판가들에게 크게 두 가지 점에서 학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하나는 그의 윤리학의 주체로 표현되는 ‘자기 배려 주체’의 성립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윤리학이 건축술적(architektonisch) 방식의 구성을 따르는 학적 체계를 완성하지 못한 채 산만한 나열식 서술에 머문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푸코 윤리학의 가치를 근원적으로 의심하게 만든다. 푸코가 주장하는 윤리가 이론적 체계를 갖지 못한다면, 그의 논의는 단편적인 사유 놀이에 그치는 것이지 학적 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푸코의 윤리학이 ‘새로운 시도’를 넘어서 ‘새로운 윤리학’으로 평가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배려 주체’의 논의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병렬적 구성 방식을 통해 그의 윤리학이 가진 체계성을 논문을 통해 해명하려 했다. 필자가 보기에 푸코의 논점은 새로운 문제의식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삶의 실천적 논의로 적용시킬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평가 받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 논문은 푸코 윤리학이 문제적 ‘화두’를 던지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적 논의의 대상이 될 만한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그의 이론적 체계 역시 일관된 관점으로 파악할 수 있음을 해명하였다. 또 푸코 윤리학에서 논의하려는 바가 원칙과 규칙을 통해 실현되는 윤리가 아니라 ‘자기’의 쾌락과 욕망에 대한 고찰로부터 ‘자기’를 ‘자기 삶’의 주인으로 훈련해왔던 ‘배려 주체’에 관한 서사임을 확인 시키는 작업이었다. 이에 필자는 다음의 네 가지 논점 해결하여 이 논문이 목표로 했던 과제를 해소했다.  

 
 

  첫째, ‘윤리학의 대상’인 인간에 관한 푸코의 관심이 그의 연구 초기부터 후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는 점을 확인했다. 둘째, 푸코의 윤리학에서 쓰이는 배려 주체의 개념이 푸코가 비판했던 근대의 주체 개념이 아니라, 근대 주체와 다른 방식으로 논의되어야 할 형성하는 주체(forming subject)개념임을 고찰했다. 셋째, 푸코 윤리학에서 다루는 ‘쾌락’ ‘사랑’ ‘가정 공동체’의 내용들을 분석하여, 그가 윤리적 인간에 관해 논의하려는 이유를 확인한다. 또 이러한 문제들을 포섭하는 ‘자기 배려 주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탐구했다. 넷째, 푸코 윤리학의 목표가 ‘경험적·선험적 이중체’로서의 인간이 구현할 수 있는 실천적 윤리를 보여주기 위한 작업이었다는 점을 드러냈다. 그리고 푸코가 생각한 실천적 윤리의 문제는 실존적 삶 안에서 자기 자신의 윤리적 지위를 고찰하고자 하는 ‘윤리적 인간’의 ‘자기 배려’ 활동을 의미한다는 점을 논구했다. 


  필자는 푸코의 윤리학이 현 시대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문제들을 담아낼 수 있는 틀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푸코 윤리학은 그 시대의 문제를 질료 삼아 논구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자기 배려 주체’의 형성 과정이 변혁과 변화의 중심에 선 바로 그 자신이 도모해야 하는 실천적 과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행복과 선의 문제를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이성과 원칙으로부터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자기’인 ‘배려 주체’로부터 구할 있다는 점에서 푸코의 윤리학은 또 다른 윤리적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성의 역사(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나남,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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