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주 / 중앙대 강사

 원우연구: 『푸코의 배려 주체와 자기 배려의 윤리』 김분선 著 (2017, 철학과 박사 논문)

본 지면은 원우들의 학위 논문을 통해 중앙대 대학원에서 어떤 연구 성과가 있는지 소개하고, 다양한 학과의 관점을 교류하고자 기획되었다. 이번 호에서는 2017년에 나온 철학과 김분선 원우의 학위 논문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토론문]

푸코에서 발견한 새로운 윤리학의 가능성


김형주 / 중앙대 강사

  푸코(Michel Foucault)의 윤리학? 해체주의자, 포스트모던의 선구자로 익히 알려진 푸코의 사상에도 윤리학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성격의 것일까. 푸코 자신이 자신의 윤리학을 정립한 것일까. 아니면 푸코의 학문 체계 내에서 ‘윤리’의 학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요소들을 정리하여 이를 추후적으로 윤리학이라 이름 붙인 것인가. 


  저자 김분선은 푸코와 니체가 그러했듯 근대적 윤리 개념의 재정립을 통해 윤리 개념 자체의 복원시도에 나선다고 말한다. 규범으로서의 윤리는 근대정신의 결과물일 뿐 인간 정신 일반의 산물은 아니라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라 이해한다. 나아가 ‘규범학’으로서의 윤리학은 윤리 자체를 위한 것일 뿐 윤리적 삶과는 이미 괴리가 있기 때문에 본래적 의미의 인문학적 윤리학의 의미가 탈색되었다고 주장한다. 푸코를 통해 복권된 윤리학은 더 이상 윤리를 위한 학이 아니라 윤리적 삶을 위한 자기 도야(Selbst-Bildung)의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푸코는 또다시 근대의 영령(英靈)들과 대결해야만 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피력하기 위해 근대의 이념들 속에 숨어 숨죽이고 있는 ‘주체’를 이불 밖으로 끄집어내야만 했다. 주체와 관련된 근대의 구호는 ‘주체는 실체다’이다. 근대적 주체 담론의 포문을 연 데카르트로부터 이 담론의 정점에 선 칸트를 거치면서 ‘주체’개념은 실체의 지위를 결코 내려놓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존립의 형이상학적 토대이자 내적 근거였다. 칸트 이후 전개되는 독일관념론은 주체의 지위를 한층 더 고양시켜 이에 자연과 역사의 존립 근거로서의 지위까지 부여한다. 이념의 왕국은 자기, 자아, 주체를 주춧돌 삼아 건립되었다.


  푸코는 근대적 주체가 세습하고 있는 이러한 이념과 형이상학 왕국의 왕좌를 찬탈해야 했고 본 논문은 그 찬탈 과정과 결과를 잘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푸코적 주체는 형성하는 주체(forming subject)다. 형성한다는 것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근대적 주체가 점유하고 있는 왕좌는 형성되어 굳어진 것이 아니다. 단지 형성되어 굳어져 있다고 오랫동안 최면을 걸어왔을 뿐이다. 실체화된 주체의 대척점에 선 변화하는 주체, 형성하고 형성되는 주체는 나약한 주체이다. 그렇기에 배려받고 돌보아질 여지가 있는 주체이다. 토론자는 이 대목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했건만, ‘근대’ 너는 너 자신에는 끝내 주목하지 않으면서 무엇을 탐구하려 하는가. 정녕 ‘너’가 실체인가. 정녕 ‘너’가 ‘세계’이자 ‘자연’인가. 푸코가 데카르트, 칸트, 셸링을 만난다면 그들보고 ‘광인’이라 했을 것이다. 


  약한 주체, 배려의 객체로서의 ‘자기’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개개인의 삶 자체, 소소한 일상에 주목하게 한다. 그것도 이미 상투어가 되어 버린 ‘일상’이라는 생활세계 일반이 아닌 바로 ‘너’와 ‘나’의 오늘과 내일에 펼쳐지는 ‘바로 그 일상’에 주목하게 한다. 저자가 말하듯 ‘바로 그 일상’에는 근대적 주체가 너무도 하찮게 여겨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사랑과 성’이 주된 이야기 거리, 철학할 거리일 수 있다. 이러한 철학적 시선에는 어쩌면 ‘윤리’라는 말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이미 오염되고 탈색되었다면 말이다.


  저자의 연구는 첫째, 푸코의 철학을 윤리학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연구하였다는 점, 둘째, 우리의 윤리적 관심을 (다가가야만 할 것 같지만 다가가기 싫은) 근엄한 도덕 교사로부터 자신의 나약함을 ‘커밍아웃’한 진실된 주체로 옮겼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토론자는 감상자를 넘어 토론자의 소임을 감당하기 위해 한 가지 질문을 보태면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포스트모던의 숙명, 그 자신이 이론화되면 그는 이미 자기모순에 빠져 버린다. 푸코의 ‘자기 배려 주체 이론’은 우리의 관심과 시선을 개체적 주체로 돌리게 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그 이상은 없는가. 우리의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 이상 무엇인가를 말해주기를 기대한다. 물론 푸코의 입장에서 이러한 기대 자체가 이미 근대적 사고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의 근성이라 폄하할 수도 있지만, 한계 지워진 것 이상을 궁금해하는 것, 조금 더 알기를 원하는 것 역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이성의 솔직한 모습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떤 것을 이론화하고 규정하는 것 역시 인간의 본연적 욕구라 할 수 있다. 푸코는 우리를, 자기를 세심히 볼 수 있는 물가로 인도하기는 한다. 그러나 거기까지 인 듯하다. 근대적 주체가 주체의 연못에서 연못의 성분분석에 주력했다면, 푸코는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에서 일종의 나르시즘을 탐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자의 의견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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