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림 / 한국유기동물복지협회 훈련사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삶]

현대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반려동물과 함께하고 있다. 이에 관련 산업시장의 규모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며 그 범위가 펫보험, 펫푸드, 펫캉스 등으로 다양하게 확대되는 상황이다. 이렇듯 반려동물이 우리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물복지, 반려동물 교육 등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미진하다. 이에 이번 기획에서는 관련 정책과 현황 등을 살펴보고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삶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우리의 삶과 함께하는 ② 책임지지 못한다면 ③ 세상에 나쁜 반려동물은 없으니까 ④ 변화하는 일상

 

건강한 반려동물 문화를 위해

윤희림 / 한국유기동물복지협회 훈련사

  반려동물에 대한 책임이란 무엇일까. 필자에게는 두 가지의 책임이 떠오른다. 하나는 반려동물을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하는 이들의 책임, 다시 말해 반려동물을 유기하거나 학대하는 이들의 책임이다. 다른 하나는 ‘애완’동물이 아닌 ‘반려’동물이라고 칭하면서도 정작 그에 걸맞는 환경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와 이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책임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책임을 ‘약속을 이행할 의무’라고 해석했다. 반려동물에 대한 개개인의 책임이란 동물을 키우거나, 입양을 희망하는 사람이 그들과 더불어 살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반려동물에 대한 사회의 책임은 동물과 함께하는 우리. 동물을 키우든 키우지 않든,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들과 함께하는 우리가 진정으로 더불어 살겠다는 약속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책임은 단 두 글자로 정의될 만큼 간단한 개념이 아니다. 활용되는 각각의 상황마다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즉, ‘누가’ 혹은 ‘무엇’에 대해 ‘어떠한’ 책임을 지는가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아직 과도기에 불과할 수 있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경우 동물권의 개념이 점차 발전하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단순히 생계유지 이외에 행복과 같은 추상적 권리들에 대해서도 논의 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려동물에 대한 책임의 의미는 그 자체로 복잡하고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체와 객체 및 내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야기하는 책임은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불평등으로까지 맞닿을 수 있다.
  다소 극단적인 사례일 수 있으나, 원룸에서 개를 키울 수밖에 없는 사람의 책임과 마당 딸린 전원주택에서 개를 키울 형편이 되는 사람에 대한 책임이 같으면 되겠는가. 전자의 경우, 반려동물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환경을 제공해줄 수 없는 사람이 개를 키우는 행위 자체가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무책임을 빌미로 불평등을 은폐하는 전형적인 논리다. 원룸이 안 된다면 투룸은 되겠는가. 투룸이 안 된다면 아파트는 되겠는가. 결국 객관적인 수치를 기준으로 책임을 논하게 된다면 단지 집의 평수나 상대적인 경제력에 따라 반려동물을 책임질 수 있는지가 결정되고, 더 나아가서는 반려동물을 키울 수 있는지에 대한 조건이 경제력으로만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반려동물 또한, 가진 자들의 전유물로 그 의미가 퇴색될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만약 원룸에서 개를 키우지만 하루 3-4시간 꾸준히 산책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녹초가 돼 대자로 뻗어버리는 개가 지내는 환경과, 마당 딸린 주택에서 개를 키우기 때문에 굳이 산책을 나가지 않아도 된다며 하루 이틀 산책을 건너뛰기도 하는 환경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어느 경우가 반려견에 대한 책임을 더욱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물론 개인마다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애견훈련을 전문으로 하는 필자의 기준과 경험에 따르면 전자의 개가 후자의 개보다 행복할 확률이 더 높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서 논한 책임에 관한 편견은 이러한 가능성을 배제해버린다. 이와 비슷한 논리는 반려동물에 할애할 수 있는 금전의 객관적 수치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물론 하나의 사례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원룸의 사례는 보더콜리 까뭉이와 함께했던 필자의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원룸에 사는 이들일지라도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그 삶은 여러 형태의 책임감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 감히 확신해 본다.

 
 

사회적 책임에 대해

  여기까지 읽었다면 반려동물에 대한 책임이란 적어도 객관적 수치나 환경만으로 국한시킬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반려동물에 대한 책임은 결국 태도와 마음의 문제로 귀결된다. 자신의 형편에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아끼는지가 그 사람이 반려동물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지표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물론 추상적인 수치를 파악하는 간접 지표로서 객관적인 기준이 활용될 수도 있고, 최소한의 기준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객관적인 지표로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안일한 태도를 견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반려동물에 대한 사회의 책임과도 맞닿아있는 문제다. 객관적인 수치만을 따져본다면 우리나라도 어느 정도 반려동물 선진국으로 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 사회가 어떤 태도로 동물을 대하는지 살펴보면 ‘반려’의 의미보다는 ‘애완’의 의미가 짙은 경우가 허다하다. 당장 차 한 대를 사더라도 해당 사실을 국가에 등록하고 세금을 낸다. 특히 그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끼칠 여지가 있다면 차의 관리를 법으로 규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입질이 심한 개를 키우든 사회성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개를 키우든 우리 사회는 이에 대해 훈련 등의 의무 사항이 없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개들로 인해 피해가 발생하게 되면 그제야 개인의 무책임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는 것이다. 이는 진정으로 반려동물을 책임지는 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이러한 사회 풍조와 미비한 규범 속에서 진심으로 반려동물을 책임지기가 쉬울 리 있겠는가. 그렇기에 반려동물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논하기 전에 우리는 사회적 책임을 논할 필요가 있다.
건강한 사회적 책임의 시작은 ‘동물관리제’다. 이는 단지 반려동물을 등록하는 것을 넘어 그로 인해 부과되는 책임을 의무화하는 것이다. 예컨대 개의 경우, 지금과 같이 소유등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허가제에 기반한 제도를 적용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개를 데려오는 과정부터 그 개가 사회에 동화돼 살아가는데 필요한 교육까지도 제도화하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선행조건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이를 충당할 수 있는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다.
  문화를 보조하기 위한 제도가 발전하고 이를 위한 예산이 확보되기 위해선 결국, 반려동물에 대한 문화가 선행적으로 조성돼야 한다. 그러나 짧지 않은 유기동물 보호소 봉사 경험과 애견훈련소 경력을 겸비한 필자의 시선에서 우리나라의 반려동물 문화는, 아직 제도적 변화를 논하기 이전의 단계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반려동물들을 진정으로 ‘반려’동물로서 생각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그러한 문화와 제도가 정착할 수 있는지 함께 간절히 고민해주길 바란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기에 이러한 고민이 막막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처럼 발전적인 고민들이 하나둘씩 모인다면, 우리 사회에 보다 건강한 반려동물 문화가 정착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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