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구 / 극작가, 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 전문위원

[2021, 블랙리스트의 현주소] ④ 현재진행형 블랙리스트

2019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 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가 간행되며 블랙리스트 사건 자체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다. 하지만 이전 블랙리스트 실행자들의 현장복귀 또는 인사이동과 관련해 최근 다시 논란이 불거졌다. 이는 블랙리스트 사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짐작하게 한다. 따라서 이번 기획을 통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련의 사건을 다시 짚어보고, 앞으로의 방향을 더듬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국가검열의 어제와 오늘 ② 대한민국 문화정책 톺아보기 ③ 문화예술, 국가지원과 공공성 ④ 현재진행형 블랙리스트

 

 
 

 

지난날과 달라지지 않은 오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좁게 해석하면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특정 예술인 혹은 단체가 배제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구체적 유형은 매우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가 청와대 및 국가정보원을 통해 공모 신청 명단의 검증을 의뢰하고, 이후 공공기관에 회신된 해당 결과에 따라 심사 과정에 개입하는 방식이 가장 흔하게 이뤄졌다. 이때 이러한 배제행위는 공공기관의 담당 직원으로부터 협조를 의뢰받은 심사위원들이 한 것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문화재단 대표이사, 심사위원, 예술단체 이사 등 주요 보직으로 활동하고 있다. 실제로 관련 책임을 물어 직장을 잃은 사람은 한 명도 없으니 이것 역시 특별히 이상한 일도 아니다.

  여전히 이 문제적 사건은 매듭지어지지 않은 상태다. 우선 지난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예술인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은 답보 중이다. 서울지역에서 제기한, 4차에 걸친 집단 소송들의 경우 대부분 1심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다. 또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가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 면서 권고된 공무원·공공기관장 등에 대한 검찰 수사도 3년째 진행되지 않은 채 공소시효 만료를 기다리고 있다.

  무엇보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을 비롯한 국정농단 블랙리스트 사건 형사 재판 역시 마무리되지 않았다. 피고인들의 블랙리스트 지시 혐의는 대부분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공공기관이 상급기관에 공모 신청 명단을 송부한 것과 심사 진행 상황을 수시로 보고하는 행위가 통상적 업무로 읽을 수 있는지, 아니면 직권 남용죄 중 하나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여부가 확정되지 못한 것이다.

  만약 이 행위가 통상적인 업무에 해당한다면 이는 앞으로도 공공기관들이 의무적으로 상급 기관에 공모 신청 명단을 송부해야 하며, 심사상황도 수시 보고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향후 공공기관 운영 방향과 관련해 중요한 재판이지만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블랙리스트 사건은 보다 근본적인 개혁은 부재한 채그저 지원금을 다시 받게 된, 이미 해결된 사건으로 보는 것이 서로에게 편한 일이 됐다.

 

좀처럼 메워지지 않는 ‘구멍’

  최근에는 블랙리스트라는 말이 공공기관에서 벌어지는 문화예술 검열 사건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는 경향이 있다. 필자는 이러한 경우 해당 단어에 따옴표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블랙리스트’가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때는 공공기관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문화예술의 검열 행위를 의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최근 일어난 ‘블랙리스트’ 관련 이슈로는 대표적으로 아시아문화원의 ‘5·18민주화운동 특별전 포스터 작품 훼손’ 사건이 있다. 아시아문화원이 하성흡 작가의 작품을 전시 포스터에 활용하는 과정에서 ‘전두환을 찢…’이라는 문구를 삭제한 것이다. 아시아문화원 측은 담당 직원의 단순한 실수라고 해명했으나 문화단체 등은 원작의 일부분을 지운 행위가 ‘고의’라고 주장하면서 대립했다.

  진행되고 있는 기관의 자체 감사 결과가 나와 봐야 조직의 관여 정도를 알 수 있겠지만, 담당 직원의 단순한 실수에 불과한 것이었다 해도 그 심각성은 달라질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직원이 해당 문구가 정치적으로 문제될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고, 이를 삭제했다는 사실 자체이기 때문이다.

  해당 기관의 주장처럼 단순한 실수에 불과하다면 무의식의 차원에서 벌어진 일일 것이 기에 더욱 문제가 심각하다고 본다. 이처럼 계속되고 있는 ‘블랙리스트’ 사건은 공공기관의 직원이 정치적인 이유로 특정 문구를 검열할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실제 검열을 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여긴다는 데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외 종로구청은 지난해 가을, 고 김용균 2주기 추모 행사에 대한 장소 사용 거부 이유로 “노동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치적인 구호’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라는 발언을 해 논란이 일었다. 또한 2019년 10월 서귀포시가 ‘문화도시’ 사업을 추진하면서그 일환으로 개최한 전시 개막식 동안, 초대 작가의 작품 ‘걸어 들어가고 걸어 나오고’를 흰색 천으로 가린 사건이 있었다. 이때 서귀포시 문화예술과 관계자들이 기획자에게 “4·3은 작년에 70주년까지 해서 다 해결되고 끝났는데 또 4·3을 작품으로 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이렇듯 반복되는 ‘블랙리스트’ 이슈들은 공공기관이 이전에 발생한 일의 유사 사례 예방에 노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변화한 기억과 해결의 주체

 

  최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1 다원예술 활동지원 리부트’ 사업 심사 과정에서 있었던 사건은 ‘블랙리스트’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필요성을 환기해줬다. 1차 예비심사 동료 평가 피드백 중 혐오 표현이나 모욕적인 발언이 그대로 지원 작가에게 전달된 것이다. “여성만 강조하는 페미니즘 성향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올바른 예술을 할 수 있는 시각을 가지고 있을지 의문이 든다. 잘못된 가치관으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보다 예술을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없다”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이밖에도 “극단적으로 한쪽 성향이 강한 사업에 지원을 해줄 필요는 없다” “다원예술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페미니스트로 보임” 등의 표현들도 전달됐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피드백이 동료 예술가의 심사평이었다는 점이다. 이 논란은 ‘블랙리스트’ 사건을 가능케 하는 토대가 단지 공공기관만의 문제가 아닌, 문화예술에 종사하는 동료의 인식 그 자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이후 5년이 지나도록 일상을 회복하지 못한 피해자들이 많다. 하지만 한때 주요 피해자였던 예술인이나 단체들이 ‘지원금’이나 ‘자리’를 과거의 피해와 엿가락 바꾸듯 하는 행태도 꽤 보였다. 그와 달리, 이전에는 위와 같은 일에 무관해 보였으나 새롭게 주목받는 주체들도 있다. 블랙리스트 사건 핵심 실무자가 총장으로 오자 투쟁에 나섰던 계원예술대 학생들, 운영 책임을 넘겨받은 후 관련 사건을 살펴보다가 큰 상처를 받았던 서울프린지네트워크 젊은 운영위원들, 지속적으로 광주시립극단 내 갑질 사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예술인들, 문재인 정부에서 ‘블랙리스트’ 피해를 겪은 예술가들이 대표적이다.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기억과 해결의 주체가 변화하고 있다. 이는 분명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우리의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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