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미 / 퀴어 문화 독립연구자


'덕질'하는 일상 ③ 젠더이슈 속 '균열된' 팬덤

팬덤이란 특정 대상을 향한 애정을 기반으로 이와 관련된 행위를 실천 및 공유하기 위해 조직된 공동체이자 그 과정에서 생산되는 문화형식 자체를 일컫는 용어다. 현재 한국의 대중문화 영역에선 ‘케이팝’ 음악 시장이 확장됨에 따라 아이돌 팬덤 문화의 역할이 새롭게 조명되는 추세다. 이번 기획에서는 대한민국 팬덤 문화의 현주소를 다루며 그 안에 얽혀있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의미를 읽어내고자 한다. 특히 매우 조직적인 하나의 네트워크로 성장한 팬덤의 정체성 이슈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덧입혀 소개하려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팬슈머로서의 팬덤 ② ‘덕후 공동체’, 그 역동성 ③ 젠더이슈 속 ‘균열된’ 팬덤 ④ 팬덤과 문화적 혼종성

 

 
 

누가 ‘케이팝 남성 아이돌의 팬덤’이 될 수 있는가
 

권지미 / 퀴어 문화 독립연구자

 

  남성 아이돌의 팬덤은 흔히 ‘남성을 무조건적인 강렬한 이성애적 감정으로 좋아하는 여성들’로 구성돼 있을 것이라는 편견 안에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전형적 이미지에서 탈락하는 이들은 팬덤 내에 무척 많다. 1세대 팬덤부터 2020년 지금의 4세대 팬덤에 이르기까지, 여러 남성 아이돌의 팬덤 내에서 여성 성소수자, 레즈비언 등의 존재감은 전혀 적지 않다. 하지만 팬덤 내외에서는 그들을 진짜 여성 성소수자가 아니라거나 ‘진정한 팬’이 아니라는 식으로 무시하고 경멸하곤 했다.
 

남성 아이돌 팬덤 속 지워지는 존재들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남성 아이돌 그룹 H.O.T.의 데뷔 이후 많은 여성 청소년 팬들 사이에선 H.O.T.의 멤버처럼 옷을 입고 숏컷 머리를 하거나 멤버들 간의 동성애를 주제로 한 팬픽(Fan Fiction)을 창작하고 소비하며, 자신도 그러한 팬픽과 유사한 동성애적 실천을 하는 것이 유행했다. 그리고 이러한 유행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호칭으로 흔히 ‘팬픽이반’이라는 말이 쓰였다. 이때 팬픽이반은 ‘이반’이 아님에도 팬픽을 보고 한때 그들을 따라할 뿐인 가짜라는 함의를 담고 있는데, 여기서 이반이란 성소수자를 가리키던 은어가 된다.

  그러나 ‘2020 퀴어돌로지’에서 김효진이 주장했듯 팬픽이반은 판타지와 표상, 그리고 현실의 관계를 가장 급진적으로 탐구한 사례라고 볼 수 있으며, 특히 판타지인 창작물의 관계를 통해 현실의 자신을 규정짓는 실천이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많은 레즈비언을 비롯한 퀴어들은 퀴어물을 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한다. 아이돌 팬픽처럼 스스로 ‘퀴어물’이 될 생각이 없었던 작품이나 아주 질 낮은 형태의 퀴어물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이들은 그런 것들을 보며 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따라서 팬픽이반은 이러한 기존의 콘텐츠 속 판타지를 통한 자기 긍정에서, 더 나아가 판타지와 현실의 관계성에 대해 급진적으로 실험했던 퀴어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팬픽이반이라고 불리던 이들이 동성애적인 실천을 했던 것이 확실한데도 그동안의 역사 속에서 아이돌 팬덤은 물론 레즈비언 및 여성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도 그 존재가 지워지고 있었다. 2020년인 지금도 여전히 이는 멸칭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트위터 등을 기반으로 남성 아이돌 팬덤 내에서 자신의 레즈비언 혹은 젠더퀴어적 정체성을 밝히는 이들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그중 일부는 퀴어 팬 단체에 소속돼 전국 각지의 퀴어문화축제에 후원하거나 부스를 열어 참가하는 등 퀴어 가시화적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런 이들에게는 수많은 사이버 불링이 흔히 이어지곤 했는데, 일례로 너희 같은 퀴어들이 우리 아이돌의 이름을 더럽힌다는 식의 말들이 많다. 심지어 이러한 공격은 먼저 비슷한 활동을 했던 여성 아이돌 혹은 여성 연예인의 퀴어 팬덤에게 가해졌던 것보다 더 격한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남성 아이돌 퀴어 팬덤의 구성원들이 앞서 언급한 ‘전형적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존의 팬덤 이미지에만 익숙한 이들은 애초에 어째서 그런 ‘퀴어’들이 남성 아이돌을 좋아하는지 그 마음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레즈비언이나 트랜스젠더퀴어적 정체성을 가진 이들 중에는 동경, 동일시와 같이 비-이성애적인 감정으로 남성 아이돌을 좋아하는 자들이 있다. 이는 남성 아이돌들이 상대적으로 양성적이거나 중성적인, 혹은 무성적이거나 젠더퀴어한 이미지들을 많이 내세우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때때로 게이 등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멋지고 당당한 비련의 디바 여성 연예인을 보고 그들을 따라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처럼, 레즈비언 등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남성성과 중성적인 이미지가 적절히 어우러진 남성 아이돌을 보며 비슷한 과정을 밟을 수 있는 것이다.
 

배제되고 탈락되는 이들은 누구인가
 

  어떤 이들이 ‘팬’이 되고 ‘팬덤’에 속할 수 있는지, 팬덤 내에 속해 있으면서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당사자들도 많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아이돌 팬덤은 유일하게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공동체로서 기능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단순히 심리적 위안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실천을 함께하며 외부로 향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16년 무렵 촛불시위 등에서 아이돌 응원봉을 들고 나가 활약한 ‘응원봉연대’의 활동, 16~18년도 무렵 페미니즘적 가치를 내걸고 수다회 등을 여러 번 진행한 ‘페미바순허브’들의 활동이 팬덤 속 사회적 실천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이들이 마음 붙이고 함께 손을 잡은 채 더 큰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멋진 공간인 팬덤은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탈락 및 배제당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모든 이들이 완벽하게 포용되는 공동체가 사실 정말 흔치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다른 공간보다 낫다고들 하는, 진보적이며 심지어 퀴어 친화적이라고 말하는 공동체들도 때로는 자신들과 너무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을 배척하거나, 거리를 두는 식으로 배제하곤 한다. 그들에게도 언제나 그럴싸한 변명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어떤 얼굴을 하기를 바라는지, 그리하여 어떤 얼굴들을 ‘우리’에게서 배척하는지 최소한 알아두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 얼굴은 때론 그들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비-이성애적 감정으로 남성 아이돌을 좋아하기에 팬덤 내에서 배제당하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들이 남성 아이돌을 '좋아하는 감정', 즉 동경과 동일시가 담긴 감정은 때때로 시스젠더 이성애자 비-퀴어가 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이는 곧 비-퀴어들도 '퀴어같은' 행동을 많이 한다는 뜻이 된다. 애초에 아무리 비-퀴어라고 해도, 퀴어하지 않은 행동만 골라서 하며 사는 이들은 흔치 않다. 공동체의 규칙을 꽤 잘 지키는 규범적인 이들이라도, 언젠가는 그 규범에서 미끄러지기 마련이다. 정말로 '남성을 무조건적인 강렬한 이성애적 감정으로 좋아하는 여성들'이라도, 어느 순간에는 그렇지 않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또한 그런 순간을 당사자가 무엇이라고 규정하든 상관없이, 필자는 그 순간들을 퀴어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누군가가 배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둬야 하는 이유에 언젠가 당신이 그곳에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좀 수준이 낮은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배제당하는 혹은 배제당했던 이라면, 누군가를 배제하는 이들에게 그렇게라도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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