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영 /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 청년유니온 정책팀장

[특집 기고문] '청년'을 의심하는 청년

바야흐로 ‘청년’의 시대다. ‘청년’은 모든 곳에서 호명되지만, 그 이름은 공허하게 맴도는 이름이다. 청년에 대한 논의는 청년‘세대’나 청년‘정치’ 같은 이름으로 불리며 청년 자체가 꽤 힙한 수식어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여전히 ‘청년’은 세대 내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납작하게 표현돼 텅 빈 이름이 됐다. 과연 누가 청년을 부르고 누가 청년으로 호명되는 것인가. 청년을 비롯해 새로운 신진 연구자들이 모여 목소리를 내는 단체가 있다. 바로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이다. 2019년 창립총회를 거쳐 활동을 이어가는 신진연구단체의 목소리를 빌려 특집 지면에서는 청년 세대가 집단화되는 방식을 담론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청년운동의 미래를 엿보고자 한다. ‘청년팔이사회’ 제목은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의 김선기연구원의 저서 《청년팔이사회》(2019)를 참고했음을 밝혀둠. <편집자 주>

 

 
 

청년팔이사회에서 청년하기

정보영 /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 청년유니온 정책팀장

   ‘총선을 앞두고 주요 정당에서는 앞다퉈 청년 인재를 영입했다’ 대략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글들도 이제는 지겹다.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청년은 제도정치 영역에 젊음, 혁신, 세대교체 등의 이미지로 이용된 지 오래다. 최근에도 청년과 정치, 청년과 총선으로 엮인 글을 수도 없이 읽었다. 하지만 지겹다고 하면 또다시 ‘정치를 혐오하는 청년’이 될까 무섭다. 우리나라 국회 평균 연령이 극도로 높은 것은 사실이기에 좀 더 젊은 사람이 국회에 많이 들어가면 좀 더 나아 보이기야 할 것이다. 필자 또한 국회가 젊어지길 원한다. 그러나 변화는 그것만으로 가능한가.


《90년생이 온다》를 공부하는 90년생들

   청년이라는 모호한 기호에는 발화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한 뜻이 담긴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청년은 세대교체의 담지자가 됐다가도 어리숙한 풋내기가 되기도 한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에서 총선을 위해 인재영입을 하겠다며 전문적 능력을 갖춘 이보다는 스토리와 이미지를 앞세운 청년들을 내세운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자 한 당내 인사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연배가 대략 50~60대가 돼야 하기 때문에 전문성이 있는 2030은 찾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그들이 ‘청년’ 인재라고 영입한 인물을 살펴보면 전문성 부재는 그들의 젊음이 아니라, ‘역경을 헤쳐온 진취적인 청년’과 같은 특정한 이미지를 가졌다는 이유로 선택됐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정당 내에서 인재를 키우지 못한 데 대한, 정당 외에서라도 자기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누군가를 찾아내지 못한 게으름에 대한 핑계다. 오히려 나이 든 이만 전문성을 갖출 수 있다는 생각 그 자체가 국회를 나이 들게 했다. 청년은 미성숙하고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 세대주의적인 인식은 논리적으로 오류일 뿐만 아니라 청년을 타자화하고 적대화한다. 위의 발언에서 보듯 국회와 정치의 고령화 현상에 대한 이유를 청년에게 돌림으로써 청년에 대한 부정적인 담론을 생산해내기 때문이다.
   게다가 권력 구조 아래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인 다수의 개인 청년들은 이 담론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젊은 사원들의 감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유명해진 책, 《90년생이 온다》(2018)는 요즘 오히려 신입사원들의 교재가 되고 있다고 한다. 직장 상사들이 이 책에 기반해 젊은 직원들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 기대에 맞춰 행동하기 위해 이 책을 읽는 것이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이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이들이 넘친다. 많은 청년 후보들이 ‘세대교체’ ‘젊음’ ‘도전정신’의 주체임을 어필하며, 스스로를 ‘도전하는 혈혈단신의 청년’이라 부르고 기성의 정치가 본인들을 호명하는 방식 내에서 역할극을 수행할 뿐,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청년 후보는 극히 드물다.


청년운동, 10년의 전략

   담론과 정치, 정책의 영역에서 이토록 ‘청년’이라는 단어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지금의 상황은 특별할 것 없이 익숙해 보이고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여기에는 201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청년운동과 그들의 전략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010년대 초반, 불평등을 비롯한 한국의 각종 사회문제를 최전선에서 경험하며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한 20~30대가 모여 선택한 단어가 바로 ‘청년’이었다.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피해자이자 경제적 약자로서 청년의 위치를 드러낸 이들은 담론과 정치의 영역에서 ‘청년’을 띄우는 데 성공했다. 청년운동 등장 이전까지 ‘청년실업’으로만 이야기되던 청년의 문제는 불안정한 노동, 주거, 소득과 부채 등 다양한 의제로 확장됐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청년’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특정한 운동의 영역을 만들어내는 데에도 성공했다. 노동조합 ‘청년유니온’으로 시작한 청년운동은 청년 주거 운동을 하는 ‘민달팽이 유니온’, 청년부채를 고민하는 청년연대은행 ‘토닥’ 등이 설립되며 확장됐다. 이들은 최저임금, 청년수당, 청년기본법, 주요 선거 등 다양한 영역과 의제에서 연대하는 운동의 생태계를 형성했다. 청년운동을 경유해 서울시 청년수당이 도입됐고, 서울시에서 가장 먼저 제정된 청년기본조례는 각 지자체로 확산돼 마침내 전국 수준의 청년기본법이 지난 2월 제정됐다. 그 뒤에는 각 지역의 청년활동가들이 모인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와 ‘청년기본법제정을위한청년단체연석회의’가 있었다. 이제까지 청년 관련 법이 청년‘고용’촉진 특별법 정도에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큰 진전이다.
   이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청년운동은 청년 문제 범주를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정책수혜자 청년을 넘어서 문제를 발화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청년을 만들어냈다. 청년당사자가 직접 정책을 제안하는 거버넌스 플랫폼인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가 올해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청년의 시각으로 내일을 설계합니다’이다. 이 문장에는 청년 정책이 ‘청년을 위한 정책’뿐만 아니라 미래사회를 위해 청년이 제안하는 정책까지를 포함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정의당이 비례대표 당선권 중 5석을 청년에게 배정하겠다 약속하고, 미래통합당이 11개 지역구에 청년후보를 공천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각 정당이 정책대상을 뛰어넘어 정치인의 자리에까지 청년을 앉히겠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은 이 흐름의 연장선 위에 있다.
청년운동은 그동안 ‘청년’이라는 단어가 가져다주는 정치적, 담론적 기회를 효과적으로 이용해왔다. 청년 세대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살아갈 이들로 여겨지기에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로 주목받았다. 청년과 청년운동은 중요한 유권자 그룹으로서 주요 선거를 경유해 정책을 도입하는 데 성공시키기도 했다. 나아가 이제 청년은 그들에게 열린 제도정치의 공간에까지 진출하고 있다.


청년에 대한 전략적 의심

   그러나 ‘청년’은 그 단어의 특성상 특정한 가치가 담기기보다는 연령으로 구획된 사회구성원들의 집단부터 떠올리게 한다. 특정한 세대를 동질적인 성격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묶어내는 일은 쉽고 선명하기 때문에 강력하다. 청년 정책 또한 마찬가지다. 청년 활동가들과 각 지역에서 시도된 청년 정책 거버넌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청년 정책은 ‘청년이 요구하는 정책’이라기보다는 ‘청년을 위한 정책’이고, 정치권이 내세우는 청년 정책 역시 청년이 원하는 정책이라기보다는 불쌍한 청년을 도와주는 정책에 가깝다. 결국 이미지만 가져다 쓴 청년 정책은 불쌍한 청년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한편, 언제까지 청년만을 위할 거냐는 식의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청년은 발화의 주체가 될 수 있고 그래야 하지만 더 이상 목적어의 자리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청년의 이름으로 사회의 불평등과 자산세습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 청년의 이름으로 한국 사회에 만연한 약자혐오에 대해 더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청년’이라는 단어가 필연적으로 ‘청년팔이사회’를 가능하게 한다면 청년운동의 당사자, 청년정치인 당사자가 ‘청년’이라는 단어가 가진 이 태생적인 양면성을 직시하고 더 비판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청년을 팔아보겠다는 기회주의자가 아니라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 ‘청년’과 세대의 구분이 자연화된 방식으로 이해되고, 이에 발맞춰 연령으로만 청년인 정치인들이 스스로를 대안적인 것으로 연출하는 이 국면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청년’을 의심하는 청년 당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청년’을 이야기하는 것 그 자체가 유용했던 타이밍이 있었고, ‘청년 문제는 청년이 제일 잘 안다’는 말이 유용하던 타이밍이 있었다. 그렇다면 모두가 청년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은, 그러나 제각각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이 타이밍에 우리는 오히려 전략적으로 ‘청년’을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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