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선 /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

오래 일하는 당신에게 ④ 노동의 시간 민주화 상상하기

한국 사회의 노동자는 OECD 평균보다 약 35일 더 일한다. 하지만 노동의 대가인 노동소득분배율은 평균치에 한참 못 미친다. 이는 한국이 전형적인 ‘저임금-장시간’ 노동사회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오래 일할 것을 강요받는가. 본 지면에서는 한국 사회의 ‘장시간 노동체제’를 다각도로 분석해 우리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본다. 나아가 장시간 노동체제라는 신화가 만들어낸 예속상태를 해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장시간 노동체제의 기원과 역사 ② 우리가 시간을 견디는 동안 ③ 노동시간 단축과 그 너머의 것들 ④ 노동의 시간 민주화 상상하기

 

 
 

 

‘죽도록 일하는 사회 끝내기’ 안내서

김영선 /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


  한 사회의 시간 구조가 어떤가에 따라 삶의 결은 확연하게 달라진다. 시간 구조는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뿐 아니라, 상상하고 관계하며 행동하는 것들을 규정짓는 틀이기 때문이다. 이는 시간 구조를 어떻게 조직하느냐에 따라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생각과 감정, 관계와 행복, 미래와 꿈의 모양까지 다르게 만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다.
  과로 체제는 이러한 모든 기획과 상상들을 질식시킨다. 과로 체제를 해체하고 더 건강한 사회로 내딛기 위해서는 제도 차원의 노동시간 단축 논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다른 상상, 다른 감각, 다른 주체, 다른 삶 나아가 다른 미래를 그리기 위한 총체적 실천이 뒷받침돼야 한다. “사회적 관계와 생산 체계, 일상의 재생산, 정신적 세계관 등 모두에 있어 대안적인 내용을 갖춰야 한다”는 영국의 사회이론가 데이비드 하비(D.Harvey)의 비판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시간의 민주화’는 비정상 상태의 과로 체제에 균열을 내는 방법이자 개인과 가족, 조직, 사회 전체에 해당하는 시대적 의제임을 담아내는 지향이다. 동시에 해체 이후의 사회를 그려가기 위한 일종의 청사진이기도 하다. 과로 체제 그 ‘이후의 사회’를 보다 건강하게, 보다 주체적으로, 지금과는 다른 감수성으로 그려나가기 위한 기획과 실천을 시간의 민주화 과정이라 일컬을 수 있다. 또한 이는 그간 당연시돼 온 폭력적인 과로 체계를 역사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본의 역공에 대항하기

  최근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반발 심리와 반격이 거세다. 한편에서는 ‘기업 경영 발목’ ‘열악한 중소기업에게는 무리’ 등 기업의 부담을 호소하는 언어들이 하나의 계열을 이루며 총공세를 펼친다. 모두 기업의 저비용 전략을 정당화하는 오래된 언어들이다. 이는 과로 체제의 영속화를 꾀하는 강력한 논리로 작용한다. 그새 52시간 상한제를 유예한다는 정부의 발표가 났다. 과로 체제가 재생산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른 한편에서는 ‘조금 더 버틸 것을 요구’하는 주문들이 반복되고 있다. 감내형 주문 또한 시간 권리를 무력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도대체 얼마나 버티고 참아야’ 과로의 굴레를 청산할 수 있단 말인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기업 부담의 논리를 앞세워 시간 권리를 무력화하고 과로 체제를 재생산하려는 ‘자본의 역공’이 새로운 화법은 아니더라도 여전한 힘으로 작용함을 주지하고 이를 타격하는 담론들을 배치해야 한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우리 사회가 폭력적인 장시간노동에 노출돼 있음에도 장시간노동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는 과로 위험에 오랫동안 노출돼 과로에 대한 문제 제기의 감수성이 무뎌진 상태, 일종의 ‘저인지’ 상태다. 한국의 노동시간은 EU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다. 하지만 장시간노동에 대한 한국인의 주관적 인식은 EU 국가 국민들에 비해 상당히 낮게 나타난다. 일에 투여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음에도 이를 문제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 이상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된다’는 파국적 상상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불가피성의 논리 걷어차기

  우리는 만성화된 과로 상태에 놓여 있음에도 ‘옛날에는 더 했어’ ‘이 정도도 못 버티면 어디서 뭘 하겠어’ 등 문제를 문제로 보지 못하게 하는 일상 언어들에 휩싸여 있다. 새로운 상상을 질식시키는 언어들은 결국 과로 체제에 복무케 하는 효과를 낳는다. 노동시장이 얼어붙은 현재의 ‘헬조선’ 맥락에서는 과로 체제를 당연시하는 야만의 언어들이 더욱 기고만장하게 된다. 감내의 언어나 불가피성의 논리는 자본의 언어와 꽤 친화적이다. 이런 언설이 참으로 부끄러운 것임을 되새기고 아예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싹을 잘라야 한다.
  자본의 논리와 친화적인 불가피성의 논리를 노동자의 관점에서 보면, 그 불가피성은 노동의 고통과 희생을 볼모로 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불가피성의 논리는 여러 겹의 문제들이 뒤엉키면서 더욱 불가피한 것으로 견고해진다. 문제적인 포괄임금제, 매우 낮은 노조 조직율, 관행이라는 이름의 조직 문화 등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밤샘·새벽노동이나 새벽노동은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당연시된다. 한 예로 ‘크런치모드(Crunch Mode)’라는 말이 있다. 게임 등 소프트웨어 개발 업계에서 마감을 앞두고 수면, 영양 섭취, 위생, 기타 사회활동 등을 희생하며 장시간 업무를 지속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장시간노동은 사용자의 접속 수가 가장 적은 새벽에 업데이트 및 버그 수정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정당화된다. 하지만 이는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업체의 효율 관점에 따른 선택일 뿐, 노동자의 건강권이나 시간권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시간을 정치화하기

  일상화된 과로 현실은 우리가 막되게 취급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런 취급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한다. 때문에 모든 차원의 개혁 가운데 감각과 감수성을 길러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즉 근면 신화의 구속력을 떨어뜨리면서 과로 체제로의 회귀를 막는 ‘시간 권리’에 대한 감수성 훈련이 필요하다. 자유시간을 주체적으로 기획하는 문화 교육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시간권리는 언제든 주변화될 위험에 처한다. 정시 퇴근 같은 일상의 시간 권리도 ‘언제든’ 일탈적인 것으로 취급될 수 있다. “공친 날 함바…하루쯤은 현장 아닌 곳에도 가보고 싶은데…노동 이외엔 어울릴 친구가 없다” 일 밖에 모르고 살던 노동자가 자유 시간을 갖게 된 상황에서 맞닥뜨린 역설적인 감정을 이야기하는 송경동의 시 〈암호명〉에서 나타나듯, 문화 교육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권리 선택에 수반되는 위험과 두려움을 떨치기 어렵다. 그 두려움의 크기가 아무리 작고, 경계의 문턱이 낮아도 이를 떨치는 일은 쉽지 않다.
  과로사 빈도가 꽤 높음에도 의제화되지 못하고 특수한 케이스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원래 지병이 있었다’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다’ 등 죽음의 원인을 개인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논리가 난무하기 때문이다. 과로로 인한 죽음을 개인적인 사유로 연결짓는 프레임은 구조적 위험의 지점들을 은폐한다. 《죽도록 일하는 사회》(2018)의 저자 모리오카 고지가 지적하듯이, 과로로 인한 죽음은 고용불안이 일상화된 현재의 맥락에서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일반적인 위험이 된다. 이에 과로와 죽음 그 사이의 사회구조적 위험들을 정치화하는 실천들이 더욱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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