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아 /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오래 일하는 당신에게 ③ 노동시간 단축과 그 너머의 것들

한국 사회의 노동자는 OECD 평균보다 약 35일 더 일한다. 하지만 노동의 대가인 노동소득분배율은 평균치에 한참 못 미친다. 이는 한국이 전형적인 ‘저임금-장시간’ 노동사회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오래 일할 것을 강요받는가. 본 지면에서는 한국 사회의 ‘장시간 노동체제’를 다각도로 분석해 우리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본다. 나아가 장시간 노동체제라는 신화가 만들어낸 예속상태를 해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장시간 노동체제의 기원과 역사 ② 우리가 시간을 견디는 동안 ③ 노동시간 단축과 그 너머의 것들 ④ 노동의 시간 민주화 상상하기

 

 
 

 

젠더 관점에서 본 ‘노동시간 문제’

신경아 /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노동시장의 ‘성별 불평등(Gender Inequality)’을 드러내는 최종 지표는 ‘성별 임금격차’다. 한국 노동시장의 성별 임금격차는 36%로,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에 속한다는 건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성별 임금격차는 산업이나 직업, 기업 규모와 같은 산업적 요인 외에 근로자의 학력·경력·성별·연령과 같은 개인적 요인과, 설명할 수 없는 차별 부분으로 구성된다. 성별 임금격차를 규명하려는 대부분의 연구들은 산업적·개인적 요인들을 변수로 데이터를 분석한다.
  이런 분석들은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사회규범과 문화에 의해 이미 전제된 ‘어떤 요소’들이 바로 그것이다. 대표적인 게 노동시간이다. 아직까지 전 세계적으로, 또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뚜렷하게 노동시간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분배돼 왔다. 각 사회의 ‘젠더레짐(Gender Regime)’, 즉 성별 관계를 규정하는 규범·관습·실천의 체계에 따라 노동시간은 차별적으로 주어진다. 대부분의 근대사회에서 남성은 생계부양자로, 여성은 가족돌봄자로 역할이 부여되며, 이런 규범에 따라 임금노동을 위한 시간은 남성의 책임이자 권리로 주어져 왔다. 반대로 여성에게는 가족돌봄시간이 우선적인 책임으로 주어졌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돌봄시간은 권리라기보다 의무의 시간으로 해석된다.
  현대사회에서 노동시간의 성별 불평등한 배분은 성별 격차를 지속시키는 핵심 요인이었다. 동시에 전통사회의 특징이던 가족이나 친족 및 공동체의 구속과 보호가 약화돼, 현대사회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생계와 삶의 안정성을 스스로 획득해 나가야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농업사회가 해체돼 여성은 생산노동의 기반을 잃고, 가족돌봄노동을 전담해 전통사회에서 가졌던 노동시간을 오히려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근대자본주의 가족의 성별분업과 ‘가정중심성(Domesticity)’ 이데올로기는 여성을 ‘가정의 천사’로 가둬 버렸다. 때문에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의 1, 2차 여성운동은 잃어버린 여성의 노동시간을 찾으려는 요구를 포함하고 있었다.

 

후기근대자본주의 사회와 노동시간의 젠더레짐

  20세기 중반 이후, 서구에서 먼저 시작된 노동시간의 재편(再編)은 복지국가체제와 여성운동, 기술 변동, 자본과 노동의 관계 변화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해 온 결과다. 노동시간의 성별 배분과 관련해 현대사회에는 다음의 네 가지 체제가 존재한다.
  첫 번째로, 남성 풀타임 노동과 여성 파트타임 노동을 결합한 1.5인 소득자 가족 모델이다. 영국이 대표적인 사례다. 본 체제에서 남성은 주요 생계부양자 역할을, 여성은 주요 돌봄자이자 생계보조자 역할을 수행한다. 맞벌이 가족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여성 역시 노동시장에 진입했지만, 가족돌봄이라는 1차적 책임을 진 채 노동시장에서는 파트타임으로 일한다. 이런 국가에서 남성은 장시간 일하며 여성의 노동시장 지위는 개선되지 않고 성별 임금격차도 지속된다. 두 번째는 장시간 노동과 고임금을 결합한 노동체제로, 미국이 대표적이다. 이런 국가에서는 대부분의 남성과 일정한 수의 여성이 긴 시간 일하며, 높은 임금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노동중심적 사회에서 돌봄은 상품화되고 아웃소싱(Outsourcing)된다. 주로 상품구입이나 타인의 노동력을 구매해 아이를 키우고 노인을 돌본다. 따라서 고임금 직업을 갖기 어려운 여성들은 전업주부나 주변적 저임금 노동에 머물 수밖에 없다. 세 번째로, 여성과 남성 모두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는 사회다. 네덜란드가 거의 유일한 사례다. 네덜란드는 1980년대 높은 실업률을 타개하려는 목적으로 여성과 남성 모두 파트타임을 선택하도록 국가차원에서 권장했다. 짧게 일하고 높은 복지를 제공하며 아이는 가정에서 부모가 책임지고 키운다는 정책이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지금, 네덜란드에서는 상대적으로 남성은 풀타임으로, 여성은 파트타임인 것으로 나타난다. 다른 국가에 비해 남성 파트타이머가 많지만 70% 이상의 남성이 풀타임이며, 50% 이상의 여성이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어 결과적으로 성별 격차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은 여성과 남성 모두 풀타임으로 일하며 돌봄을 국가와 지역사회가 책임지는 모델이다. 핀란드와 스웨덴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모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노동시간 단축’이다. 성별이나 가족 상태에 관계없이 풀타임으로 일하되, 노동시간을 대폭 줄여 가족돌봄 책임 역시 모든 개인들이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 동시에 이 모델에서 돌봄의 1차적 책임은 국가와 지역사회 공동체에 있는 것으로 전제한다. 부모가 일터에 나가 있는 동안 아이들은 공공 보육시설에서 질 높은 돌봄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사회적 약속이 이행된 것이다.
  루베리(J.Rubery)나 페이건(C.Fagan)과 같은 여성학자들은 영국이나 미국처럼 장시간 노동체제를 유지하면서 돌봄을 여성들에게 맡겨 온 사례를 성차별적 모델로 본다. 그리고 네덜란드 같이 남녀 모두 파트타임을 권장하지만 결과적으로 성별 격차를 지속시킨 국가를 젠더타협적인 모델로 해석했다. 핀란드나 스웨덴처럼 노동시간을 적극적으로 단축하고 돌봄책임을 공공화함으로써 성별 격차를 줄여온 경우를 가장 성평등한 모델로 평가한다.

 

한국 사회 젠더정책의 ‘정답’을 향해

  최근 한국에서도 노동시간 단축이 중요한 사회적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부터 정부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주52시간 노동제를 시행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정부의 시도는 기업의 반발에 부닥쳐 휘청거리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노동시간을 왜 줄여나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제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일자리 확대를 주요 목적이라고 제시하지만, 그 효과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다. 또한 단지 쉬거나 ‘저녁이 있는 하루’를 얻기 위해서라면 그동안 노동시간 단축운동의 가장 큰 장애요인이었던 ‘임금’의 문제를 넘어서기 어렵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쉼’보다는 ‘돈’을 선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시간 단축은 불평등하게 배분된 성별 격차를 해소하고, 자신의 생계를 위한 기회와 자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성평등한 민주주의 사회 구축의 핵심이다. 노동시간 단축 없이 ‘일·가족 양립정책’이나 ‘일·생활 균형정책’ 등 노동자의 돌봄책임 이행을 위한 시간 지원정책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 즉 대다수의 여성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과 돌봄이라는 이중 부담을 진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이 오히려 그들을 조직에서 주변화시키는 딜레마적 현상이 계속돼 왔다. 한국 사회의 젠더정책이 ‘정답’을 향해가려면, 이런 정책들이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함께 병행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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