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혁 / 한신대 평화교양대학 교수

기록이 걷는 길, 아카이브 ③ 세계기록문화유산 화성성역의궤

보급화 된 개인 미디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일상을 습관처럼 기록한다. 그리고 매체 곳곳에서 ‘아카이브(ARCHIVES)’라는 용어를 어렵지 않게 마주친다. 사실 아카이브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기록 자체’ 혹은 ‘그 기록을 보존하는 기관’을 말하지만, 우리의 일상 속에서는 단순히 자료의 백업·보관 등의 의미로 사용하곤 한다. 이렇듯 용어가 문화 속으로 넓게 파고든 틈 사이로, 은연중에 인지하고 있는 기록과 아카이브의 의미 및 가치를 보다 질적으로 깊이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사회적 기억으로서의 아카이브 ② ‘국가’의 ‘기록’, 그 중요성을 말하다 ③ 세계기록문화유산 ‘화성성역의궤’ ④ 기록물과 WWW, 디지털 아카이브의 시대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세계기록유산의 모범, 화성성역의궤

김준혁 / 한신대 평화교양대학 교수

  1997년 12월 6일 나폴리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역사적인 발표가 울려 퍼졌다. “화성(華城)은 동서양을 망라해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특징을 고루 갖춘 근대 초기 군대 건축물의 뛰어난 모범이다.” 세계문화유산위원회 집행위원장은 화성의 문화적 우수성에 대해 강조한 뒤, 수원화성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다고 선언했다. 당시 유네스코 심사위원으로 화성을 방문한 스리랑카의 실바(N.Silva) 교수는 “화성의 역사는 불과 200년밖에 안 됐지만 성곽의 건축물이 동일한 것 없이 각기 다른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라며 유네스코의 결정을 뒷받침했다.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이 되기까지

  이 같은 역사적 쾌거가 있기 전, 프랑스 파리의 한 카페에서 작은 모임이 있었다. 모임의 참석자들은 바로 유네스코 이사들이었다. 유네스코는 총회가 열리기 약 6개월 전에 이사회를 개최한다. 이사회는 각 나라에서 신청한 세계문화유산 예비 후보를 심사하기 위해 각국에 파견된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은 뒤, 총회에서의 등재 권고 여부를 결정한다. 이때 등재 권고가 결정되면 유네스코 총회에서 반려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실상 등재 결정은 총회가 아니라 이사회에서 이뤄진다. 이 유네스코 이사회 개최 기간 중 이사회 이사 거의 전원이 공식 회의 시간이 아님에도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화성’을 두고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이유인즉, 화성 그 자체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지만, 현재의 화성은 과거 6.25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해당 상황을 파악한 수원시장은 파리를 방문해, 유네스코 이사회에 심사 집행위원들과의 만남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틀 뒤 유네스코 이사회에서는 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권고했다. 이는 곧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확정이었다.
  고민하던 그들로부터 등재 결정이라는 명쾌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때문이었다. 당시 수원시장은 서지학자인 고(故) 이종학 독도박물관장이 영인한 《화성성역의궤》 영인본을 들고 집행위원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들에게 화성 제작의 모든 기록을 담고 있는 《화성성역의궤》를 보여줌으로써, 화성이 기록에 의해 철저하게 본래의 것과 다름없이 다시 만들어진 것임을 강조했다. 당시 집행위원들은 의궤의 기록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그처럼 상세한 역사 기록을 본 적이 없었으니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화성전도_수원화성박물관 제공
화성전도_수원화성박물관 제공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역사와 만나다

  화성이 축성되기 1년 전인 1795년, 화성행궁에서는 조선 왕실 최대의 행사가 열렸다. 바로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의 회갑연이었다. 정조는 준비 단계에서부터 시작해 화성에서의 행차 과정과 창경궁에서 이뤄진 6월 회갑일의 작은 잔치까지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이 기록이 바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다. 이후 정조는 화성을 축성(築城)하는 과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자 했다. 화성 성역 작업이 끝나자, 앞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본 따 이와 같은 체제로 화성축성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하고 책으로 남기기를 지시했다. 이 과정을 통해 탄생한 것이 《화성성역의궤》다. 두 기록은 행사에 참여한 사람의 신분을 막론해 명단에 모두 기록하고, 행사에 들어간 비용을 ‘어떤 물품이 몇 개요, 그 단가가 몇 전’이라는 것까지 일일이 기록해 놓았다. 또한 행사에 참여한 미천한 신분의 노동자 및 기술자의 이름과 주소, 복무 일수, 실제 한 일, 품값 등을 세세히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각 시설물의 모든 도면과 성역 축성에 이용된 과학기기들의 세분 단면과 크기까지, 말 그대로 ‘모두’ 기록돼 있다. 이는 단순한 행차보고서나 공사보고서가 아닌 정조의 ‘국가운영능력’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된 화성의 설계도면에는 총계획도 1매와 부분도 60매가 있는데, 여기에는 실학자이며 신예 관료였던 다산 정약용과 화가 엄치욱 등의 대담한 구상과 기술적인 창견(創見), 성역을 주관한 채제공과 조심태 등 중신의 의견이 반영됐다. 또한 다산의 ‘성설(城說)’, 정조의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이 입안·시행되기 위해, 중국과 경성의 성제(城制), 곡성(曲城)과 초루(言焦樓)에 대한 유성룡(柳成龍)의 방법, 중국 모원의(茅元儀)의 《무비지(武備志)》, 그리고 유형원, 이익과 동시대의 홍대용, 박지원 등 선진적인 실학자들의 경륜이 직간접으로 종합·검토된 것이었다.
  성역의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각 처소에 배치된 공장(工匠)들이며, 이들은 전국에서 차출돼 왔다. 《화성성역의궤》의 권4 공장 조에 의하면, 전국에서 동원된 석수·목수·이장(泥匠, 미장이) 등 공장들을 각 직종별, 지역별로 그 이름과 부역 처소 및 부역 연일수(延日數)를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이 역사적인 성역 과정에는 인원수 총 11,821명, 연일수는 376,342일 반, 그 경비는 873,520냥에 곡식 1,500석이 동원됐다. 또 화성의 축성 규모는 《화성성역의궤》 권수 산상(山上) 부분에 의하면 2,944보 4척, 평지부분 1,019보 4척, 합계 3,963보 8척이다. 이는 성축 당시의 총연장 4,600보(5,743.56m) 중에서 문루·포루·포대·공심돈 등의 연장 635보 4척(793.69m)을 뺀 성벽만의 총연장을 말한 것이다. 또 앞의 기록에 의하면, 산지 부분이 2,944보 4자, 평지 부분이 1,019보 4자로 기록해 놓고 있다.
  우리는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계량적 수치 외에 당시 성역에 참가한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다. 인간성 좋은 박선노미, 키가 작아 놀림을 받았던 김자근노미, 키 큰 최큰노미, 머리가 큰 이대두노미 등을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일이 힘들다고 게으름을 피운 사람들, 임금 지급에 대해 항의하는 사람들, 그들을 통해 과거 사람들이나 현재 사람들이나 사는 것이 똑같다고 웃을 수도 있다. 이처럼 생생한 기록은 과거의 역사가 지금의 우리에게 와 닿고, 또 공감토록 하는 생생한 경험을 하게 한다.

프랑스어판 화성성역의궤_수원화성박물관 제공
프랑스어판 화성성역의궤_수원화성박물관 제공

  이 같은 기록 문화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이는 국가의 문명과 직결되는 것이다. 우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수한 기록문화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정조 시대 문화의 우수성, 즉 세계 일류문명국가라는 당대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세계기록유산위원회는 2007년 ‘조선왕조의궤’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조선왕조의궤’ 가운데 《화성성역의궤》 역시 포함돼 있다. 보존해야할 우리 선대들의 기록문화 정신이 앞으로도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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