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진 / 서울대 법과대학 석사 수료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여성정치 ② 한국정치의 여성주의 테제

본 지면에서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주체적 판단과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자 했던 ‘낙태죄’를 살펴봄으로써 그간의 낙태죄 논의에 정치적·역사적 맥락을 부여한다. 이를 통해 여성의 몸을 도구화하고 소수자의 몸을 폐기하고자 하는 우생학적 정책을 담은 모자보건법의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이은진, 〈낙태죄의 의미구성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고찰〉, 《페미니즘 연구》 제17권 제2호’를 바탕으로 쓰였음을 밝혀둠.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여성, 정치를 다시 읽다 ② 한국정치의 여성주의 테제 ③ 정치적 존재로서의 여성 ④ 정체성 정치, 그 이상으로

 

한국여성민우회 '낙태죄 폐지 공동 성명' 중 일부 
한국여성민우회 '낙태죄 폐지 공동 성명' 중 일부 

 

낙태죄 법제, 시대적 모순의 집약체

이은진 / 서울대 법과대학 석사 수료

 

  2016년 9월, 보건복지부는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시행령’의 일부 개정안을 발표했다. 해당 법안은 ‘의료법’ 제66조 제1항 제1호, 동법 시행령 제32조 제2호의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불법 인공임신중절을 명시하고, 그것을 범한 의사에게 부과되는 자격정지의 기간을 기존 1개월에서 최대 12개월까지 늘린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사실상 실효성을 잃은 낙태죄 조문을 재가동하려는 움직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를 도화선 삼아, 낙태죄 폐지 운동이 재점화됐다. 해당 운동은 연대 범위 등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 시위 카페 BWAVE’와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으로 나뉘어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인 규모를 자랑했다. 또한 양측 모두 국가가 여성의 몸을 인구정책의 도구로 사용해 온 역사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다.
  ‘성과 재생산 포럼’ 등의 페미니스트와 재생산권 연구자 및 활동가들은 서구의 ‘프로 라이프(Pro-life) 대 프로 초이스(Pro-choice)’ 구도로는 설명 될 수 없는 한국의 맥락에 주목해, 재생산권(Reproductive rights)이나 재생산 정의(Reproductive justice)와 같이 제3세계적 맥락을 담을 수 있는 개념에 천착했다. 이처럼 한국 사회라는 토양에서 여성의 임신중단을 둘러싼 지형을 바라본다는 시도는 환영할만하다. 정확한 현실 인식을 토대로 한 해결 방안을 찾아나가고, 서구에 대한 지적 종속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이론을 생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법으로 읽는 인구정책의 역사

  한국 사회에서 ‘낙태죄’라는 범죄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출산 제고 및 억제라는 국가의 인구정책 목적에 따라 처벌조문이 제·개정되고, 법의 실효적 집행 여부가 바뀌어왔다. 이뿐만 아니라, 임신중단 행위를 바라보는 시각도 ‘애국’에서 ‘살인’을 오고간 바 있다. 따라서 낙태죄와 관련된 법제 및 정책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들이 구성되고 변천해온 역사적 흐름 속에서 상호작용하고 맞부딪혔던 권력들에게로 우리를 데려가준다. 이를 마주하다보면,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식민지기에 형성된 형법상 낙태죄, 개발독재기에 가족계획사업과 발맞춰 제정된 ‘모자보건법’, 저출산 위기 담론이 확산되면서 낙태죄 처벌의 재가동을 위해 추진된 ‘의료관계행정처분규칙 시행령’ 개정안 등 통시적 변화는 현행 낙태죄 법제 속에 병렬적 모양새로 공존하고 있다.
  조선시대 형법은 타인의 구타에 의한 낙태인 타태죄(墮胎罪)만을 처벌하고 있으며, 구한말에 펴낸 형법대전에서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낙태 행위만을 규제했다. 한반도에서 여성 스스로 임신을 중단한 행위를 처벌하는 조문은 1912년 ‘조선형사령’에 의해 일본 형법이 의용(依用)되면서 처음 나타난다. 당시 의용된 것은 1907년 일본이 형법 개정을 통해 강화했던 낙태죄 조문인데, 그 배경에는 “국가에 중요한 것은 전쟁에 쓸 병사의 숫자이며, 그 수를 줄이는 일은 허용될 수 없는 범죄”라는 군국주의 출생증강 사상이 자리하고 있다. 한반도는 1945년 광복을 맞이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으로 인해 남한이 3년 동안 미군정기를 겪으며 과거 청산의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다. 1948년 7월 17일 제정헌법의 제10장 부칙 제100조 “현행법령은 이 법령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에서 알 수 있듯, 미군정기가 끝난 후에도 식민지기 일본의 법제를 상당부분 그대로 유지시킨다. 이에 따라 낙태죄 조문은 1953년 최초의 형법전(刑法典)이 시행되기 전까지 그대로 존속했다. 정작 일본에서는 더 이른 시기에 수차례 개정이 이뤄졌음을 고려하면, 피식민국이 겪는 식민성의 끈질긴 지속이 역설적일만큼 분명하게 드러난다.
  1953년에도 여전히 낙태죄는 존치하는데, 그 과정에서 인구정책적 관점이 근거로 꼽혔다. 당시 국회에서는 낙태죄를 존치하자는 법안과 낙태죄를 전면 삭제하자는 법안이 모두 제출돼 토론이 이뤄졌는데, 토론의 양방 모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구정책적 효용성을 제시한 것이다. 태아의 생명은 오히려 부차적인 근거에 불과했고, 여성의 자기결정권 측면은 전혀 조명된 바 없었다. 최종적으로 통과된 낙태죄 조문은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의 수정을 거친 것이었는데, 법사위는 당시 민주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헌법정신에 입각해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여러 조문을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낙태죄 법안은 오히려 '부동의낙태죄' 조문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보강했다. 이는 당시의 가부장적 젠더 질서가 인권이 논의되는 장에서조차 여성의 삶을 사각지대로 내몰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가족계획사업과 여성의 통제

  임신중단의 예외적 허용 사유를 규정하고 있는 ‘모자보건법’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1960년대에 들어, 국제 인구 통제 레짐은 제3세계 정부들에게 인구 통제 정책을 수용했을 시 풍부한 재정적·기술적·지적 원조를 약속했다. 외국의 원조와 지원을 원했던 박정희 정권은 대대적인 가족계획을 시행해 피임뿐 아니라, 임신중단 역시 공공연하게 권장했다. 나아가 종교계조차 반대의견 표명이 불가능했던 유신 시기에 다다르자, 비상 국무회의에서 ‘모자보건법’을 통과시킴으로써 법적 근거까지 마련한다. 당시 임신중단은 합법적 테두리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행해지는 등 법제와는 유리된 방식의 정책이었다. 이는 당시 정권의 의도적인 선택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이 규범적 비난과 예산 마련의 부담 모두를 회피하고자, 임신중단 합법화보다는 형법상 낙태죄를 둔 채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모자보건법’ 이중적 법제를 채택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문제의 책임소재는 정부가 아닌 여성에게 둠으로써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 역시 놓지 않았다. 또한 ‘우생학’이라는 단어를 조문에 명시함으로써 차별적 시선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이는 식민지기 일본을 휩쓴 우생학적 산아제한론의 영향이다. 정작 일본에서는 1966년 개정을 통해 ‘우생보호법’을 ‘모성보호법’으로 변경하고, 관련 조항 및 표현을 삭제한 것과 비교하면 ‘이식된 법’의 경직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앞서 언급했던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시행령’ 개정 시도는 낙태죄를 부활시킴으로써 저출산 위기를 타개하려는 움직임이었다. 형법도 모자보건법도 아닌, 더 하위의 규범을 동원한 것은 과거 가족계획사업을 통해 피임과 임신중단을 ‘애국’ ‘국민의 의무’ ‘현명한 모성’ 등으로 의미 구성했던 역사를 전면으로 뒤집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태아의 생명’에 대한 담론이 급부상하게 된 것 역시 새로운 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낙태죄의 주된 보호 법익이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것은 강학상(講學上)의 입장일 뿐, 입법과정이나 정책 실행의 실질적인 면에 있어 논의 주축이 아니었으나 이 시기에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절차규정이 부재한 모자보건법의 허술함을 감추고자 의료인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이 같은 방식은 현장에서 의료인의 재량이 커진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나, 오히려 여성들이 의료인과의 관계에서 더욱 취약한 처지에 놓이게끔 만든다.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상상

  법을 내적 완결성이 존재하는 독자적 체계로 여기는 통념적 시각과는 달리, 한국의 법은 각 시대의 흔적들이 겹겹이 쌓여있는 역사적 지층과도 같다. 설사 사문화됐다고 해도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여전히 여차하면 강제성과 집행력을 담보로 한 법에 의해 기소되고 처벌될 수 있다. 그렇기에 한국 사회 속 낙태죄는 단순한 과거도, 담론을 발생시키는 연성의 지식이나 권력도 아닌, 생생한 현실의 원리다. 현행 법제 하, 임신할 수 있는 몸의 소유자인 여성들의 경험은 과거의 시대적 모순들이 고스란히 집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법과 정책을 추동했던 관점과 시각의 자체적인 변화가 필수적이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를 선고한 현 시점에, 인구정책적 관점을 탈피해 공동체의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미룰 수 없는 시대적 당면 과제다.
  낙태죄 법제의 역사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해주고 있다. 표피의 장치만을 제거한다고 해서, 우리를 옥죄어 왔던 굴레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유사한 것이 다시 일시적으로 비워진 자리를 차지하거나 형태만 바꿔 새로이 부활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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