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음 / 과학저술가

[과학] 인간과 바이러스 ① 인류 역사와 바이러스

인류와 바이러스는 오랜 세월 동안 밀고 밀리는 싸움을 지속해왔으나 신종 바이러스의 유행주기는 점점 짧아지며, 변이를 예측하기도 어려워지고 있다. 핵산과 단백질 껍질로 이뤄진 단순한 구조의 이 생명체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날만 기다리는 듯하다. 그렇다면 바이러스의 예고된 공격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이번 기획을 통해 현대 과학이 밝혀낸 바이러스의 특성을 알아보고 감염의 진단과 확산의 예방을 위해 어떠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 그 동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인류 역사와 바이러스 ② 바이러스의 진단과 백신개발 ③ 바이러스의 전염과 확산 예방 기술 ④ 인간과 바이러스의 공존

 

 

Disease X, 바이러스의 역사


이한음 / 과학저술가


  바이러스는 인류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바이러스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역사의 경로가 바뀌었을 사례도 많다. 과거 천연두는 그야말로 재앙으로서 인구 증가 자체를 억제하는 자연력이었다.
  천연두보다는 못할지라도, 에볼라출혈열과 지카열처럼 바이러스는 지금도 인류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곤 한다. 이러한 유행병은 보건 위생 수단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시험하는 한편, 적어도 보건 위생과 과학 지식의 보급이라는 측면에서 아직 세계가 불평등함을 말해준다. 본 글에서는 인류 역사에 영향을 끼친 바이러스를 확산 원인과 관련지어 살펴보자.


전쟁과 바이러스

  16세기에 에르난 코르테스(H.Corte)가 이끄는 스페인 정복자들은 9백 명도 안 되는 군대로 아스테카 왕국의 수도로 진격했다. 그런데 이들이 마주친 것은 죽은 시체들뿐이었다. 아즈텍족은 정복자들의 몸에 있던 천연두와 홍역의 공격을 받아 이미 거의 전멸했다.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멕시코 지역의 인구는 몇 년 사이에 절반 이하로 줄었다.
  북아메리카도 마찬가지였다. 콜럼버스가 첫 발을 디딘 뒤 약 150년 사이에 북아메리카의 인구 80퍼센트가 사라졌다. 같은 바이러스의 공격 때문이었다. 인간이 새로운 바이러스를 접할 때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가 빚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1918년에 약 5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도 바이러스가 전쟁에 관여한 대표적인 사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지만, 미국은 1917년 봄에야 참전했다. 미국의 참전으로 전세는 바뀌었다. 하지만 그 참전은 뜻하지 않은 비극을 불러왔다. 미국의 훈련소에서 독감에 걸린 군인들이 독감바이러스를 유럽과 아시아 전역으로 퍼뜨렸기 때문이다. 전쟁 자체로 죽은 사람은 군인 9백만 명, 민간인 7백만 명이었다. 독감바이러스로 죽은 사람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았다.


보건 위생과 과학적 사고

  스페인 독감이 엄청난 피해를 입힌 것은 바이러스의 병원성과 감염성이 유례없이 강했던 탓도 있지만, 전쟁터의 나쁜 위생 상태도 한몫을 했다. 백신이나 합병증을 막아줄 항생제도 없었으니 확산은 순식간이었다.
  물의 소독, 상처의 소독, 개인위생 같은 개념은 파스퇴르가 세균이 부패를 일으킨다는 것을 발견한 뒤로 19세기 유럽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 뒤로 유행병의 위세는 크게 줄었다. 그러나 세계에는 19세기 과학 발전의 혜택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곳들이 아직 많다. 그런 곳에서는 예외 없이 바이러스가 유행병을 일으킨다.
  2013년부터 4년간 서아프리카를 휩쓴 에볼라출혈열이 대표적이다. 치사율이 거의 60퍼센트에 달하는 이 유행병이 맹위를 떨친 데에는 의료 장비, 상수도, 위생 시설의 부족이 큰 이유를 차지했다. 거기에다가 과학에 기반을 둔 의학 대신에 지역 풍습과 미신적 사고에 기대는 태도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15년부터 남아메리카에 유행하기 시작해 동남아시아까지 번진 지카열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지카바이러스에 감염된 태아의 머리가 작아지는 후유증이 나타나 많은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모기를 통해 전파되는 이 병의 확산에도 낮은 보건 위생 수준, 과학적 사고 부족, 지역 풍습이 악영향을 미쳤다.
  인류가 지금까지 유행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박멸하는데 성공한 사례는 딱 하나다. 바로 천연두바이러스다. 전 세계가 힘을 합쳐서 올바른 지식과 백신 보급에 힘쓴 덕분에 1980년에 사라졌다. 소아마비와 홍역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들도 박멸 직전까지 왔다가, 백신의 부작용에 대한 잘못된 지식의 전파, 저개발 지역의 불안한 정치 상황 등이 개입하면서 지금은 지지부진해지고 있다. 최근 들어 홍역 환자는 오히려 늘고 있다.


세계화와 환경 파괴

  최근에는 바이러스 유행병이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곤 한다. 사스·조류독감·구제역이 대표적이며, 주된 이유는 세계화와 교통수단의 발달이다. 전 세계의 사람과 물자가 대규모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바이러스의 확산도 함께 빨라진다. 또 거의 해마다 가축에게 심각한 피해를 일으키는 조류독감과 구제역은 닭, 오리, 돼지, 소 등 가축을 대규모로 밀집 사육하는 방식이 큰 영향을 끼친다.
  여기에 지구 온난화와 야생 환경의 파괴도 한몫을 한다. 모기가 옮기는 지카열이 그런 사례다. 지카바이러스를 가진 모기가 살던 야생 지역으로 인간과 가축이 침입하고, 온난화로 모기의 서식 범위가 확산된 결과다.
  2002년에 대유행한 사스는 이 흐름에 더해 새로운 바이러스의 출현 양상까지 보여준다. 사스의 진원지로 여겨지는 중국 광둥의 야생동물 시장에는 온갖 동물이 한데 모여 있다. 그래서 본래 약한 감기 증상을 일으키던 코로나바이러스의 유전자가 종들 사이에서 조합되면서 강한 병원성을 띠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인구 증가에 따라 이런 요인들의 영향도 더욱 커지며, 인류가 바이러스 유행병에 시달릴 가능성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


역사로부터 배우는 바이러스 대책

  최근에 항바이러스약이 개발되고 있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바이러스 유행병을 막는 데 주로 사용한 대책은 두 가지다. 바로 백신과 격리다. 백신은 천연두, 소아마비처럼 변이 가능성이 낮고 다른 숙주가 없거나 종(種)간 전이가 일어나지 않는 바이러스에 효과가 좋다. 또 그보다 효과가 떨어지고 어느 정도는 운에 기대야 하지만, 독감바이러스를 예방하는 용도로도 널리 쓰인다.
  하지만 유행병에는 여전히 격리가 가장 널리 쓰이며, 효과도 좋다. 사스, 메르스, 조류독감, 구제역 등이 퍼지려 할 때 일단 격리 조치부터 취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공기를 통해 전파된다면 격리는 효과가 적다. 독감처럼 병원성이 약해서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 격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게다가 바이러스 유행병임을 뒤늦게야 알아차린다면 격리 조치의 효과도 그만큼 낮아진다. 1980년대 초에 대유행하면서 약 3천5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에이즈가 대표적이다.
  인류는 해충이나 세균 등 인류 역사에 피해를 끼친 다른 생물들을 물리치는 데는 많은 성과를 올렸지만, 바이러스의 공격에는 여전히 자신 있게 내밀 방어 수단이 부족하다.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 자체가 부족한 탓도 있다. 바이러스는 금방 사라지고 흔적을 잘 남기지 않기 때문에, 과거의 양상을 연구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바이러스는 앞으로도 오랜 기간 인류 역사에 관여할 가능성이 높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으로 문명과 보건 위생이 위기에 빠질 때면 더욱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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