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선희 /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원우연구: 『1970년대 이현화 희곡의 남성성 연구』 박종수 著 (2017, 국엉국문학과 석사 논문)

  본 지면은 원우들의 학위 논문을 통해 중앙대 대학원에서 어떤 연구 성과가 있는지 소개하고, 다양한 학과의 관점을 교류하고자 기획되었다. 이번호에서는 국어국문학과 박종수 원우의 논문을 통해 1970년대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정체와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토론문]


남성 불안과 폭력 사이의 ‘더 이상’ 은밀하지 않은 공모


민선희 /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여성가족부·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강력범죄 피해자의 여성 비율이 1995년 29.9%에서 2015년에는 88.9%로 치솟았다. 한때 무뚝뚝하고 권위적인 아버지의 이미지가 대중적인 개그 코드로 부상하더니 요리하는 남자들의 붐이 대중 매체를 장악하고, 요즘은 내조하는 아내의 이미지를 닮은 인기 가수의 남편과 그들의 민박집이 이슈가 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역할과 그 이미지는 현재에 이르러 분명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앞선 통계자료나 최근 여성 혐오의 노골성은 그 변화의 이면에 존재하는 모순과 분열의 불안정성을 암시한다. 박종수의 논문은 이 시대의 가정적이고 부드러운 남성 이미지가 아닌 강하고 굳건한 전사적 남성성의 위기와 분열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시대적으로 변모 가능한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이론적 함의가 그 논의의 토대라는 점에서 현재 한국 사회가 이상적이라고 여기고 있는 남성성의 불안한 내적 구조를 엿볼 수 있는 거울과 같다.


  박종수는 기존의 젠더 논의가 주목하고 있던 이현화 희곡 속 여성을 향한 남성 폭력에 대한 해석을 70년대 국가적 차원의 통제된 남성성과 여성, 그리고 그 둘의 관계를 통해 시작하고 있다. 1970년대 정부가 요구했던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레이건 시기의 하드 바디(hard body)와 동일한 모습으로 국가 자체를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이러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국가는 올바른 남성의 정체성을 강인한 육체로 설정했고, 이 육체는 곧 국가의 힘이며 소유물로 끊임없이 통제됐다. 이때 강인한 육체가 없는 여성은 남성을 생산할 수 있는 어머니의 몸을 통해서 국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여성들은 가정 밖에서 노동운동의 주역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여성의 매춘 행위 또한 국가를 위한 희생이자 안보적 외교 행위로 설정되고 있었다. 즉 이 시기의 남성성의 위기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대한 강한 부담뿐만 아니라 여성 육체에 대한 모순된 시선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현화 희곡에서 재현되고 있는 남성의 공포는 매우 다층적이며 모순적이다. 특히 육체와 폭력의 관계는 남성의 열등감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


  아들러가 말한 ‘남성적 항의’의 근간은 남성이 느끼는 열등성 이전에 이미 열등한 것으로 남성성과 이분화 되어 있는 여성성의 존재이다. 남성성 위기의 극복을 위한 과시성의 희생으로 여성이 가능한 이유는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기 때문인데, 이현화 희곡에서 재현되고 있는 여성들은 국가나 남성의 육체성과 관계하고 나아가 여성들과 연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즉 이때 여성에 대한 폭력은 남성 주체가 자신들의 타자성을 극복하기 위해 보다 ‘더 타자화 된’ 존재를 억압함으로서 위기를 극복하는 구조와는 조금 다르다. 무엇보다 70년대 이현화 희곡에서 폭력의 대상은 여성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 시기 남성성의 위기에 내포된 여성의 모순성은 단순히 여성만을 타자화 할 수 없게 만든다. 여성성은 더 이상 남성성에 대비된 열등성으로 무조건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박종수는 남성의 위기와 그 대응의 구조를 ‘전이’로 연결시키면서 매우 의미심장한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회피성의 순환구조이다. 전이는 불안과 폭력의 무용성을 끊임없이 남성에게 반사한다. 이제 여성에 대한 폭력은 남성성의 문제를 회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문제가 고스란히 여성에게 전이되어 그들의 육체에 새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여성을 향한 폭력과 그들의 희생은 이제 더 이상 여성의 문제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이현화 희곡의 일반적 젠더 논의 또한 확장한다. 이현화의 희곡에서 폭력의 구조를 파시즘적 지배 논리나 시대적 모순의 알레고리로 해석할 때,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이는 자연스럽게 남성의 세계를 의미하고 가해자는 암묵적으로 남성임을 지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 남성도 피해자이며, 피해자일 수 있다. 이는 가해자도 피해자라는 헛소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불안·위기와 공모하는 폭력의 구조이다.


 방송 매체를 통해서 쏟아지는 작금의 남성 이미지들은 그 획일성과 일방향성 그리고 무비판적 유행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70년대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상화된 남성성 즉,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관계 속에 존재하는 지배·종속·착취·배제 등이 상기하는 폭력성이다. 그리고 더 이상 불안과 폭력의 공모는 비밀이 아니다. 코넬은 젠더란 남·녀 모두가 관계하는 하나의 장소이자 실천이며, 이를 역동적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남성성과 여성성에 관해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물론 이해가 곧바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 사이의 소중한 ‘관계’ 대신 놓여 있는 증오와 폭력을 해결하려고 하는 실천의 소중한 한 걸음으로서 우리는 이해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 출발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균형 잡힌 시각을, 70년대 남성성 고찰을 통해 시사했다는 점에서 박종수의 논문은 의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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