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수 / 국어국문학 박사과정

원우연구: 『1970년대 이현화 희곡의 남성성 연구』 박종수 著 (2017, 국어국문학과 석사 논문)

 

  본 지면은 원우들의 학위 논문을 통해 중앙대 대학원에서 어떤 연구 성과가 있는지 소개하고, 다양한 학과의 관점을 교류하고자 기획되었다. 이번호에서는 국어국문학과 박종수 원우의 논문을 통해 1970년대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정체와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연구]


이현화 희곡에 나타난  1970년대 남성성의 위기와 한계


박종수 / 국어국문학 박사과정


  이현화는 활발한 창작 활동을 통하여 파격적인 주제와 형식의 실험을 보여줌으로써 197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현화의 이러한 파격적인 주제와 형식은 독자와 관객들에게 난해함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특히 이현화의 희곡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을 향한 폭력은 이현화가 ‘여성학대자’나 ‘사디스트’라는 평가에 직접 해명을 해야 할 만큼 독자와 관객들에게 충격적으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이현화에 대한 초기 연구에서도 여성을 향한 폭력의 문제는 작가 개인이 지닌 한계로 인식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이현화 희곡에 나타나는 폭력에 관한 연구가 이어지면서,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폭력을 시대의 알레고리로 바라보려는 시각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여성을 향한 폭력이라는 문제 역시 이현화 개인의 취향 문제에서 벗어나 사회·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따라 여성을 향한 폭력의 문제는 곧 이현화 희곡에 나타나는 젠더(Gender)에 관한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1970년대의 작품에 나타나는 젠더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시기에 나타난 독특한 남성성에 대하여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희진은 《남성성과 젠더(권김현영 외, 자음과 모음, 2011)》에서 1970년대의 남성성을 “무력에 대한 추구, 강자에 대한 의존성, 여성에 대한 보호자 의식이 없는 남성성”으로 규정지으며 일관된 남성성으로 이를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1970년대 남성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기에 따라 남성성이 변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시기에 다양한 남성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때 코넬(R. W. Connell)의 헤게모니적 남성성(Hegemonic masculinity) 개념은 1970년대 남성성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 중요한 관점을 제시한다. 코넬은 특정한 시대에 다수의 남성성들(masculinities)이 존재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에 주목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헤게모니적 남성성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시대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인식하는 남성성을 의미한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으로부터의 어긋난 탈주


  1970년대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박정희 정부가 강조했던 전쟁에 참여하는 전사로서의 남성성, 즉 ‘훈련된 군인’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이러한 전사로서의 남성성의 핵심은 당연히 애국심이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강조되는 것은 바로 ‘멸사봉공(滅私奉公)’이었다. 결국 국민에게 올바른 남성은 적과 싸울 수 있는 강인한 육체를 지니고 있으며, 이를 통해 국가를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다는 정신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1970년대 남성들이 강인한 남성성으로의 변화를 반드시 긍정적으로만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 남성들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희생할 수 있는 위대한 남성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에 현실적인 한계를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1970년대 남성들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배후에 있는 낙오자들을 인식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은 주변에 이를 달성하지 못한 수많은 낙오자가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시기 남성들은 자신이 위대한 남성상이 될 수 있는지를 성찰하기보다는, 이미 스스로가 낙오자들은 도달할 수 없는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자각을 통해 자신을 위안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희생되는 것이 바로 국민이 되지 못한 여성들이었다.

  이현화 희곡 안에서 국가는 남성의 육체로만 재현되지 않는다. 그의 희곡에서 남성 등장인물들을 위협하는 것은 <요한을 찾습니다(1969)>에서는 여성인 간호원의 육체로, <쉬-쉬-쉬-잇(1976)>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의 육체로 표현된다. 심지어 인간의 무의식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0.917(1977, 1980)>에서는 소녀마저도 자신의 육체를 통하여 남성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이때 이현화 희곡 안에서 남성의 육체는 여성의 유혹과 비난으로 끊임없이 무력한 것으로 변화하며, 이로 인하여 여성들에게 패배하기에 이른다. <요한을 찾습니다>에서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남성인 요한은 간호원에 유혹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토록 두려워하던 병원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또한 <쉬-쉬-쉬-잇>에서 남자는 자신의 육체의 가치를 여자에게 증명하려 하지만, 여성에 의하여 ‘박제된’ 육체로 묘사됨에 따라 점차 여성에게 조종받는 무력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는 남성들이 평범한 육체로는 올바른 남성이 될 수 없었던 1970년대 남성의 공포가 투영되고 있다 할 것이다. 이때 주목하여야 할 것은 남성성의 위기 그 자체보다는 이에 대한 남성들의 대응이라 할 수 있다. 남성들은 헤게모니적 남성 집단에 포함되거나 혹은 배제되지 않기 위해, 남성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어떠한 실천을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패배하는 순간, 남성들은 갑작스레 참지 못할 분노를 느끼고 이를 폭력으로 표출하기 시작한다. <쉬-쉬-쉬-잇>에서 자신을 위협하는 여인을 향한 남자의 분노는 결국 우발적인 폭행으로 이어지게 되며, 결국 여인이 사망하기에 이른다. <0.917>에서 남자가 소녀를 살해하는 장면은 더욱 명확하게 남자의 분노를 보여준다. <쉬-쉬-쉬-잇>에서 남자의 살인이 충동적인 것이었다면, <0.917>에서 남자의 살인은 소녀의 뺨을 때리고 목을 조르는 것과 같이 지극히 의도적인 행위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폭력은 자신을 위협하는 여성을 처단함으로써 남성이 공포를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남성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현화의 희곡에서 남성들은 이러한 폭력을 통해서도 여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이로 인하여 끝없는 공포를 느끼게 된다. <0.917>에서 남자는 소녀의 시체를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소파 뒤에 숨기지만, 어느새 소녀의 시체는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이를 확인한 남자가 소녀의 웃음소리를 듣는 것으로 극은 막을 내리게 된다. <쉬-쉬-쉬-잇>은 극이 진행됨에 따라 여인의 죽음이 거짓이었으며, 이 모든 것이 여인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남자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아내와 함께 여인에게서 탈출하려 하지만, 아내도 여인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기에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남성성들이 꿈꾸는 상상적 봉합


  이현화의 희곡에 등장하는 여성의 육체가 공포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남성들이 꿈꾸는 상상적 봉합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남성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부담을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타자인 여성의 육체로 전이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여성은 공포의 대상에서 문제의 원인으로 탈바꿈하게 되며, 남성은 여성에 의한 피해자로 남게 된다. 그러나 이현화의 희곡에서도 남성들은 상상적 봉합을 통하여 남성성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확인한다. 그의 작품들은 남성에게 주어진 문제를 여성의 육체로 전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이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쉬-쉬-쉬-잇>의 여인과 <0.917>의 소녀의 육체는 결코 남성이 처한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여성을 살해하는 극단적인 결말에 이르더라도, 이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으므로 다시 동일한 공포를 느끼는 상황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젠더 문제에 있어서 이현화가 지닌 한계는 이 시기 남성에 의해 여성이 겪어야 했던 희생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현화의 희곡에서 여성은 남성에 의해 희생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으면서도 이에 대한 여성의 공포와 분노는 제거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현화의 희곡은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여성을 향한 폭력을 통해, 남성성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남성들의 시도가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그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젠더의 문제는 1970년대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지닌 모순으로 인하여 혼란스러워하는 남성의 모습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행해지고 있는 여성을 향한 폭력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폭로의 지점에서, 과거와는 다른 오늘날의 헤게모니적 남성성에 대한 고민과 젠더 논의로의 출발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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