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진 / 국어국문학과 교수

[연구실에서 보낸 편지]

기술적 대상에 대한 단상(斷想)

박명진 / 국어국문학과 교수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이세돌과 알파고(AlphaGo)와의 바둑 대결은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져준 사건이었다. 각종 매체는 이 대결을 전형적인 서바이벌 게임의 포맷으로 통속화시킴으로써 ‘인간↔기계’의 SF의 디스토피아적 서사로 재생산했다. 그러나 소위 인공지능의 개발과 그 의미, 다시 말해 “기술적 대상(Technical Objects)의 존재 양식”(질베르 시몽동) 문제는 단지 이 대국(對局)에서 발견된 것은 아니었다. 첨단 과학기술에의 희망과 공포는, 프로이트의 의미대로 ‘사후(事後)에 구성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일상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인공지능 시스템의 환경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대국이 준 충격은 ‘기술적 대상’에 대한 유토피아적/디스토피아적 정동(affect)을 사후에 재구성한 것에 불과하다.

이 대국은 ‘인간은 무엇인가?’ 또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로 우리를 유도한다. 알파고라는 신예 스타의 등장은 오랜 역사를 지닌 인문학과 예술의 기본 사유 방식에 결정적인 균열 지점을 만든다. 주지하듯이 인문학과 예술은 동물을 포함한 자연 세계가 감히 할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이었고, 그 덕분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명예를 지킬 수 있었다. 인간만이 사유(思惟)할 수 있고, 창조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고, 자기 행위를 교정할 수 있었다. ‘인간’ 또는 ‘인간의 마음’이 소위 ‘생물학적 피부-부대(skin-bag)’ 내부에 한정될 수 있었으며, 이에 따라 인간은 독립된 사유 주체로서 모든 객체와 분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적인 정의(定義)는 이제 합당한 것이 아니라고 비판받는다. 시몽동에 따르면, 기술적 대상들은 인간의 합목적적인 의도만으로 제작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내적 필연성’에 따라 진보한다는 것, 결국은 인간과 기계가 ‘공진화(共進化)’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해러웨이나 들뢰즈/가타리에 이르면, 인간은 이제 사이보그나 기계로 정의된다.

더 나아가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 이론은 인간과 기계(모든 객체들)는 적대적이고 단절된 관계가 아니라 서로 섞여 있는 혼종적 관계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행위자연결망 이론(ANT; actor-network theory)에서는 인간과 비인간은 분리될 수 없으며, 사회라는 것도 인간-비인간의 복합체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결국 인간이 기계이고, 기계가 인간이라는 것.

마르크스가 인간이란 “자기의 활동에 의해 자연 소재의 형태를 인간에게 유용하게 변경”시키는 노동을 통해 존재 조건을 갖는다고 한 근대적 주체론은 이러한 ‘인간-기계’ 이론에 의해 의심받고 있다. 인간을 ‘기계/기술적 대상’을 규율하는 주체라고 확정하기도 어렵고, 결국 기계와 공존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학과 기술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파악한다면 역사의 경험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한나 아렌트의 성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벤야민의 경고처럼, “기술은 강의 흐름이 나아갈 운하를 파는 대신 인간의 흐름을 전쟁의 참호 속으로 흘러들어가게 하고, 비행기를 통해 씨를 뿌리는 대신 화염폭탄을 도시에 뿌리고 있으며, 아우라를 새로운 방식으로 없앨 수단을 가스전(戰)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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