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시그워스 저, <정동이론>(갈무리, 2016)

 [지금 이 책!]

다양한 분야의 시의적인 (학술)주제를 가진 서적을 소개하며 여러 분야의 연구동향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정동(affect)과 공동체(commune)에 관한 이론을 연구하는 모임 ‘aff-com(아프꼼)’이 발간하는 총서 2권인 <정동이론>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아직 아니지만, 함께 하기

- 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시그워스 저, <정동이론>(갈무리, 2016) -  

김만석 / 미술비평, 국문학자

 

 
 
<정동이론>이 다루는 것은 단순화해서 말해 몸과 마음의 마주침에 관한 것이다. 몸과 마음을 대립적으로 분리해서 사고하는 대신, 우발적인 마주침의 순간을 연구의 영토로 삼으려는 것이 이 책의 기본적인 모토이다. 스피노자로부터 연원한 것으로 알려진 ‘정동(affects)’은 감정이나 기분, 느낌을 다루지만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전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몸의 변화를 생각과 함께 다루고자 하는 것을 일컫는다. 사실 정동은 이런 정의적인 방식으로 ‘확정’되어야 할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스피노자의 말처럼 “우리는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몸은 어떤 특정한 용법 속에 고정되지 않으며 항상 정동되거나 정동하는 ‘목록/창안’을 통해서 특이하게 제시될 수 있을 뿐이다. 경주용 말과 경작용 말은 ‘말’의 종으로서는 같을 수 있지만, 행위의 방식에 따르면 경작용 말은 오히려 경주용 말이 아니라 소와 더 가깝다. 이러한 행위는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무엇이 되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만약 인간 세계 내에서 마주침에 응하지 못하는 ‘몸’, 곧 정동하거나 정동되지 못하는 몸이 도달하는 영역이 죽음이라면, 인간의 몸과 생각은 지속적으로 무엇인가가 되어갈 때에만 살아 있다고 가정해도 좋을 것이다. 즉 삶을 가능하게 하는 ‘힘(생명)’(과 힘의 마주침)이 <정동이론>의 필자들이 주목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동은 ‘아직 아님’이라는 ‘사이’의 순간이다. 그렇지만 정동이라는 ‘아직 아님’이 현실의 가능성에 비해 풍부한 잠재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해서 이것을 반드시 긍정적인 것이라고 여길 수는 없다. 정동은 이것과 저것 모두로 이행하거나 변이할 수 있는 힘이므로, 그 힘을 현실 속에서 혐오와 냉소로 흐르게 할 수도 있으며 훈육과 통제를 통해서 통치의 언어로 조절하고 관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아직 아님’이라는 힘이 모조리 그러한 현실적 정치경제나 문화, 언어로 환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희망이 불식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1970년대 후반 어느 여성 노동자의 수기에는 정동에 관한 목록이나 창안을 선취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는데, “미싱과 친숙함으로 맺은 지 길고도 짧은 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1년 동안에 미싱의 주제 파악은 완전하게 체험을 통해 알았다”고 하면서 인간과 기계 사이의 마주침의 목록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서술한 바 있다. 이러한 목록은 그녀뿐만 아니라 여러 노동자들을 통해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작성된다. 그 목록들은 수기에 그저 널려 있지만, 적어도 그러한 목록들이 흐르는 방향은 “세상아 없어져라.” “세상아 바뀌어라.”는 요구와 요청, 어떤 희망의 서식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 노동자들의 저 희망은 단순한 ‘호소’가 아니다. 마치 현재의 우리 삶 역시 엄청난 고통과 재앙에 가까운 현실을 경유하면서 겨우 ‘생존’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저자들이 밝혔듯 정동이론을 통해서 구성할 수 있는 희망은 잔혹함을 경유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달리 말해, 이 저작이 ‘행복, 위협의 정치, 수치, 낙관주의, 음식, 전쟁, 육체관리 서비스, 정신건강 서비스, 바이오 미디어, 사무실, 글래머’와 같이 일상에서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느낌’을 매만지고 있지만, 그것에 어른거리는 잔혹함의 느낌은 떨쳐내기가 어렵다. 신자유주의적 생산과 소비가 몸과 마음을 지속적이자 동시적으로 강탈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현재적 삶의 고통스러움은 현재 이후(너머)를 ‘이것임’으로 구성할 수 있을 것인지 선뜻 대답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를 타진해보기 위해선, ‘연구’라는 기왕의 습속이나 형식으로부터의 변이와 변형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지속적인 실험과 목록/창안을 통해 말할 수 없는 실패를 거듭하면서 나아가는 일 외에는 도리가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실험들을 거듭하는 흐름 가운데 하나가 이 책의 번역을 기획한 ‘연구모임 아프꼼’일 것이다. 이 연구모임은 기존의 제도적인 언어를 통해서 마주할 수 없었던 다양한 ‘인터페이스’들과 만나 정동하고 (혹은 정동되고) 그 언어들을 기록하기를 오랜 시간 멈추지 않아왔다. 부산에서, 서울에서, 일본의 교토와 도쿄, 요코하마, 후쿠오카와 오키나와를 수시로 오가며, ‘인터페이스’를 지속적으로, 현실적으로 구성하고자 했다. 이들의 실험이 ‘이것임’을 현실 위에 구성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들의 활동은 완결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부단히 부대끼고 마주치면서, 그 속에서 창안되는 목록들을 계속 차곡차곡 기록하는,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구체적인 활동의 궤적이나 흔적이야말로 앞으로 희망을 추출하는 다종다양한 말을 예비하거나 제공해줄지도 모르겠다. 그런 느낌에 휩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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