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저, <사랑의 기술>(문예출판사, 1993)

   [편집자의 서재]

2016년, 다시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저, <사랑의 기술>(문예출판사, 1993)

 
 
언제부터인가 서점에 ‘연애’ ‘사랑’‘여자의 마음, 남자의 마음’ 같은 키워드 책들이 에세이 코너 신간 진열대를 꾸준히 채우고 있다. 그 중심에는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연애 혹은 섹스 칼럼니스트들의 저작이 있다. 남이 뭐 먹고 사는지,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는 안 궁금해도 그 사람이 연애를 하는지, 결혼을 ‘언제’하는지는 늘 관심이 많은 대한민국에서 사랑은 왜 ‘글’로 배우는 게 됐을까. 이런 고민을 하면 책의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매력’을 키워라. ‘매력’이 자본이다.”

그녀들은 “연애란 외모가 좌우하는 것이 아니니 다른 매력을 키워서 연애에 성공하고 더 당당한 여성이 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이유는 결국 그 ‘매력’이라는 말조차 ‘능력’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매력조차도 능력으로 간주되어 계발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매력이라는 것은 결국 성적인 매력으로밖에 안 들린다. 그녀들은 사적 공간에서만 이뤄지던 ‘섹스’ 이야기를 방송에서 드러내고, 금기를 깨는 주체적 여성이란 이미지로 정신적 우위까지 선점한다. 하지만 대중에게 지극히 사적인 영역의 테크닉까지 전수해 주는 권위를 가졌음에도 그 내용이 ‘섹시함’과 ‘성적 매력’에 머무르며 남성 중심의 시선을 전혀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더 없이 초라해 보인다.

에리히 프롬은 일찍이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교환가치로 만드는 자본주의는 ‘사랑’의 원리와 양립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현대사회의 소외되는 개인들이 사랑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프롬은 사랑이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유일한 답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한 대상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서 세계의 모든 관계를 포용하는 것이다.” 프롬이 말한 이 구절을 떠올려 보면 ‘사랑’이란 개인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사회적 영역의 변화를 상상하게 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했던 프롬이 가장 경계했던 것은 사랑을 이성이 결여된 감정의 산물로만 보는 태도였다. 그는 사랑을 배울 필요가 없다는 말은 사랑을 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을 ‘받는’ 문제로만 보고 그 ‘대상’에 천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전제에서 보면 프롬에게 ‘능력’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고 ‘무능력’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 없다는 뜻이 된다. 때문에 ‘매력’과 ‘성’을 ‘능력’으로 보는 지금 우리의 현실과는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프롬은 책의 후반부에서 몇 가지의 진짜 ‘사랑의 기술’을 제시하며 그것의 실천을 강조한다. 훈련과 정신집중, 인내와 최고의 관심이라는 방법이 다소 추상적이고 즉각적으로 적용할 수 있어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이 시대의 불안과 위태로움 속에서 ‘연애’를 하는 것도 고생스러워 소외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에게 매력이 능력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덜 이질적으로 보인다.
꼭 십 년 전에 이 지면에 같은 책을 소개했다. 시간이 그렇게 흘렀어도 2016년 대한민국에서 이 책은 여전히 유용해 보인다. 이렇게 오래도록 회자되다니. 기술(skill, technique)을 배워야 하는 시대인데 단연 으뜸 되는 기술(Art)이 아닌가. 고전은 고전이다.


안혜숙 편집위원|ahs11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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