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 / 시인, 문학예술콘텐츠학과 박사과정

 [개입하는 비평]

이 기획은 단순한 소재주의를 넘어, 지속적인 담론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시의적 문화현상을 다룬다. 언제나 이미 우리가 잠겨있는 문화를 통해 정치 및 경제에 대한 비판적 개입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이 문화비평 기획의 의도이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백종원 현상 ②온라인 페미니즘 ③신경숙 표절논란 ④왜 아빠를 딸에게 부탁해?

 
 

표절도 문학권력도 문제가 아니다

황인찬 / 시인, 문학예술콘텐츠학과 박사과정

1. 그런데 정말로 문제가 뭡니까

그간의 일을 복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신경숙 표절 사태와 일련의 사건들 이후 한국문학이 짊어지게 된 묘한 죄의식에 대해서만은 지적해둬야겠다. 사람들은 한국문학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새삼스럽게)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포털사이트의 관련 뉴스에서 주를 이루던 “썩었다” 운운하는 댓글들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 크게 동의를 하든, 그것을 부정하든, 한국문학이 무엇인가 잘못되어있다는 생각만은 다들 갖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뾰족하게 잡히지 않는다는 데 있을 것이다. 표절이 문제인가? 신경숙이 문제인가? 표절을 한 신경숙을 기묘한 논리로 옹호한 창비가 문제인가? 문학적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시장논리에 편승한 출판사가 문제인가? 문학적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시장논리에 편승한 출판사가 문제라고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문제인가? 문학권력이 문제인가? 정말 문학권력이 문제인가? 문학권력을 가능하게 한 문학제도의 폐쇄성이 문제인가? 문학제도가 폐쇄적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문학제도의 빈약한 경제적 기반이 문제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신자유주의가 문제인가?

이 문제에 대해 논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봉착하는 문제적 지점은 바로 문제적 지점을 특정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단지 표절이 문제였다면 표절을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대응을 보이는 것으로 상황이 충분히 정리될 것이다. 문학권력이 문제였다면 문학권력을 해체하거나 완화하는 방향의 대응책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문학동네가 1세대 편집위원과 경영자의 사퇴를 발표하며 변혁을 준비 중이라고 발표했던 것처럼, 제도를 정비하는 것만으로 사태는 나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사건이 발생했다면 사건을 정리해야 하고, 제도가 고장났다면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정말 충분한가? 그러면 한국문학은 건강성을 회복하는 것인가?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 나로서는 상황이 본질적으로 달라졌다는, 혹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 어렵다. 문학‘권력’도 문학‘장’도 문학‘제도’도 문제이면서 문제가 아닌 듯한 기분이 든다면, 다시 문제를 처음으로 돌려보자. 어쩌면 정말로 ‘문학’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닐까?

 

2.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겁니까 

내가 주목한 것은 신경숙 사태를 둘러싸고 나타난 세대 간의 묘한 온도차였다. 어떻게 신경숙이, 창비가 이럴 수가 있느냐며 강도 높은 비판을 하던 윗세대와는 달리 젊은 세대는 SNS 등에 자신의 의견을 밝히기는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던 것이다. 젊은 세대가 비판 의식이 부족하다거나, 소위 침묵의 카르텔에 굴복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 자신이 이 사안에 대해 공적인 발언을 할 명분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욱 진상에 가깝다. 즉 사태에 대해 각 세대가 느끼는 거리 감각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윗세대가 그토록 강도 높은 비판의 목소리를 보인 것은 그들 자신이 갖고 있던 신경숙과 특히 창비에 대한 깊은 신뢰와 또 그만큼 깊은 배신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창비가 긴 세월 축적해온 문학적 위상은 바로 그들 세대가 함께 만들어나간 것이었기에 창비의 행보에 대해 더욱 강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에게는 그런 감각이 없다. 젊은 세대에게 신경숙은 그저 옛날 작가로, 창비는 긴 역사와 조금 경직된 태도를 가진 대형출판사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어쩌면 문제는 여기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논의의 주체 모두가 동일한 장에 속해있다는 전제 아래 이뤄진 것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모든 주체들은 문학에 대해, 그리고 문학제도에 대해 말하면서도 전혀 다른 것을 호명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윗세대가 문학에 기대하는 것과 젊은 세대가 문학에 기대하는 것, 그리고 창비가 문학에 기대하는 것이 미묘한 시차를 드러내는 이 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좀처럼 명료해지지 않는 문제를 조금이나마 더 명료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의 시차(視差/時差)를 조정하는 게 우선일 것이다.

나는 지금 창비가 고루한 태도를 가졌다는 비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신경숙 사태를 통해 새삼 불거진 창비의 고립(혹은 고착) 상태의 연원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한국문학이 처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싶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상정하고 있는 문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각자가 서 있는 문학의 자리가 대체 무엇인지 다시 새삼스럽게 확인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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