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입하는 비평]

이 기획은 단순한 소재주의를 넘어, 지속적인 담론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시의적 문화현상을 다룬다. 언제나 이미 우리가 잠겨있는 문화를 통해 정치 및 경제에 대한 비판적 개입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이 문화비평 기획의 의도이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백종원 현상 ②온라인 페미니즘 ③신경숙 표절논란 ④왜 아빠를 딸에게 부탁해?

 
 

메갈리아에 대한 단상들 

A. 인터넷상의 ‘갤러리’라는 의미도 생경한 이에게 ‘메갈리아’라는 용어는 더욱 낯설거니와, 의미는 고사하고 신조어를 외우고 그들의 언어에 따라가기도 급급하다. 그런데 그곳이 ‘녹색의 땅’이라니! 메갈리아는 ‘메르스 갤러리(메갤)’와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에 나오는 여성중심 사회 ‘이갈리아’의 합성어다. 홍콩에서 메르스 의심환자 여성 두 명이 격리를 거부한 것이 알려지며 메갤에서 여성혐오 여론이 생겨나자, 이에 대한 반작용에서 발흥했다는 것이 메갈리아 탄생의 대표적 가설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묘사되는 세상은, 금기가 없고, 자유로우며, 여성을 중심으로 성취를 이루는 사건들이 전혀 낯설지 않다. 메갈리안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메갈리아라는 공간에서 새로운 주체로 스스로를 발명해냈다.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현상과 이상세계를 조합한 단어로 제격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갈리아의 딸들처럼 진취적이면서도 꽤 공격적인 성향도 보인다. “여자가 집에서 밥은 않고…”라는 문장을 얼핏이라도 들어 본 적 있다면, 누가 이 공격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러니한 것은, 이곳 ‘녹색의 땅’에 있는 공지사항이다. “1.친목, 네임드화 금지 2.일반인 비하 금지 3.지역 비하, 장애인 비하 금지” 등등. 녹색의 땅에 이렇게 많은 규제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혐오에 대한 대응이 또 다른 혐오를 낳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겠지만, 나는 진정한 자유는 규제 없이도 질서가 가능한 사회에서 구현된다고 믿는다. 이곳 녹색의 땅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규제 없이도 질서 있는 사회가 요청되는 것이다.

 

B. 메갈리아에서 몰래카메라 근절 캠페인 글을 보고 꽤 충격을 받았다. 지하철을 타고 길거리를 다녀도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어느 하나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에 대한 절망은, 내 집조차 편한 곳이 아님을 느꼈을 땐 분노로 변했다. 이후 ‘미러링’을 통해 올라오는 실제 남성들이 작성한 여성혐오 글들과 여성들이 혐오에 맞서는 이야기가 생각지도 못한 범위까지 쏟아져 나오면서 스트레스는 더 커졌다. 직면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마주했을 땐 익숙했던 모든 것이 낯선 것으로 전복된다. 이처럼 안전하다 여겼던 공간들에 대한 균열은, 실은 그곳에 기본적으로 갖춰져야 할 ‘성 평등’에 대한 고민이 없었음을 방증한다.

  인터넷 “김치녀”가 실체 없는 여성을 지칭했던 것처럼, 생물학적 성별이 그 사람의 성 평등 지수를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혐오 발화주체들이 대부분 남성이었기에, 맘속에 그들에 대한 불편함이 꿈틀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되새겨본다. ‘실체 있는’ 대상에 직접 맞서자고.

  메갈리아는 여러 단체와 함께 몰래카메라 근절운동, 소라넷 폐쇄 청원 서명, 여성살인을 미화한 잡지 <맥심> 반대 서명 등 실천적인 변화를 끌어내며 일상의 균열과 동시에 연대의 힘을 낳았다. 이젠 ‘혼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에 대한 불편함과 이질감은 나 혼자의 몫이 아니다. 당신의 분노는 더 이상 ‘여성이기에 히스테리적’이고 ‘감정적’이며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분노케 한 세상에 직접 칼을 겨눌 때가 왔다.

 

C. 메갈리아는 김치녀거나 개념녀라는, 그간 남성에 의해 규정되어 온 ‘여성’ 집단성이 허구라는 것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따라서 이곳은 불화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메갈리아는 선명한 지향과 목표로 형성된 결사체, 확고한 정체성을 토대로 구성된 운동체가 아니라, 허구였던 규정에 반(反)하는 공동체, 즉 ‘무엇이 아닌 것’으로서의 집합체에 가깝기 때문이다. 메갈리아는 여성을 혐오하면서 정체성과 유대를 형성하는 지배적 남성성, 즉 외부와 불화한다. 또한, 하나로 수렴될 수 없는 페미니즘의 다양성 속에서, 내부적으로 불화한다. 메갈리아에서 일베와 마찬가지로 남성 ‘일반’에 대한 허구가 구성된다고 비판하고 싶은 ‘탈씹치남’이 있다면, 그 비판의 방향은 메갈리아 반대편을 향해야 한다. 남성을 향해, 남성으로서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될 때 남성 집단성의 허구화는 깨질 것이다. 메갈리아가 일으키는 외부적 불화는 ‘남성 집단’으로부터 이탈하는 남성이 되기를 강제하는 힘이다.

  한편, “보슬아치와 실좆은 미러링 관계인가?”라는 루인(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연구원)의 질문은 내부의 불화를 보여준다. 남성과 여성을 외부성기 형태로 환원하는 태도는 오히려 페미니즘의 젠더정치가 지양하고 비판해온 것이자,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를 말도 안 되는 범주 취급하거나 여/남의 이분법 어딘가로 밀어 넣는 폭력이었다. 이 내‧외부의 불화 모두 정치의 원리이다. 정치가 ‘자격 갖춘 사람들’의 행정이 아니라 ‘아무나’의 평등을 증명하는 과정이라면, 불화는 “지배공간에서 말로 인정되지 않아 분노와 고통의 소음쯤으로 치부되던 말들을 그 지배공간에서 듣게” 만듦으로써 정치를 발아시킨다. 젠더를 물화하지 않으면서 젠더 정치를 고민하는 모순의 공간으로, 메갈리아는 좀 더 오래 불화해야 한다.


정우정·황나리·홍보람 편집위원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