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훈 / 수유너머N 연구원

나에게 ‘시설’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사건에 대한 기억을 수반한다. 2007년 2월 21일 전라남도 여수에서 화재가 발생해 10명이 숨지고 18명이 부상을 당했다.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운영하던 외국인 보호시설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곳에 감금되어있던 소위 ‘불법체류자’들이 화재로 희생당했다. 외국인보호소는 감옥과 같은 ‘교정시설’은 아니다. 이 시설의 목적 자체가 대한민국의 법을 위반한 외국인을 본국으로 추방하기 전에 단기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사회 내부에 통합될 수 있도록 한국 사회의 도덕규범과 법준수 감각을 익히도록 교정하는 기능을 하는 곳도 아니다. 그들은 국민이라는 자격을 가지지 못한 자이기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교정될 필요도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즉 외국인 보호소라는 시설은 이 사회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는 자들을 분류해두는 격리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설’이 단지 외국인 보호소만일까? 전두환 정권초기 사회정화를 명분으로 설립된 삼청교육대, 19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을 통해 수용한 형제복지원, 에바다 재단을 비롯한 각종 사설 장애인 수용 시설 등이 보여주는 것도 바로 한 사회의 정상적인 구성원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판단된 자들에 대한 배제와 격리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시설의 문제는 권력이 작동하는 기본적인 방식과 관련된다. 권력이란 근본적으로 자격의 결정을 그 근본적 역할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설의 문제는 단지 특정한 고유명사를 가진 몇몇 시설만의 문제가 아니다. 또 어떤 시설이 불법적으로 운영되고 수용된 이들에게 인권침해를 자행한 경우만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시설이 정확히 권력의 자격 결정이라는 기능과 관련돼 있다면 시설은 권력에 의해 자격의 박탈이 행해지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시설’을 통해 권력이 우리 사회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볼 수 있고 그러한 권력의 작동방식을 통해 우리 사회의 성격을 일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비정상인과 생명권력의 이면 

푸코는 자격의 결정이라는 문제, 즉 누가 사회 안에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들인가를 결정하는 권력의 기능을 권력이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하는 방식에 대한 일련의 연구를 통해 논의했다. ‘침묵의 고고학’이라는 별칭을 가진 그의 저작인 <광기의 역사>는 권력이 어떻게 비정상성을 다루는지를 분석하는 책이다. 푸코는 광기를 다루는 권력의 기술이 변화되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비정상적 광기가 어떻게 정상적 이성의 명백한 타자가 되어 언어를 잃어버리고 침묵하게 되는지 보여준다. 결국 비정상성이란 한 사회 안에서 유의미한 목소리를 가질 자격이 없는 것, 그것의 운명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침묵의 공간으로 유폐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상성과 비정상의 구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권력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분석은 이후 푸코의 작업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된다.

이후 생명정치를 다루는 논의에서 푸코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보다 강화된다. 주지하듯 생명정치란 국가를 구성하는 인구의 생명력을 종적 차원에서 육성하고 강화하여 국가에 유용한 힘으로 활용하려는 권력의 테크놀로지를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생명권력의 긍정적인 측면의 배면에는 매우 부정적인 면모가 동시에 존재한다. 그것은 인구를 이루는 특정한 집단이나 부분이 전체 인구의 건강성을 해치거나 생명력을 저해한다고 판단될 때 그 집단 내지는 부분을 전체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죽음의 권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 인구의 건강성과 생명력의 증진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요소란 근본적으로 규범으로부터 벗어난 행위를 하는 자들, 즉 비정상적 존재들이다. 생명권력은 이들을 죽음에의 강제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그러한 죽음에의 강제란 ‘단순히 직접적인 살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간접적인 살인, 예컨대 죽음의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 어떤 사람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증가시키는 것, 혹은 그저 단순히 정치적 죽음이나 추방, 방치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생명권력에 내재된 이 같은 죽음권력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푸코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생명권력의 적극적 작용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주목하려하는 자격박탈의 권력이 그 본모습이 드러내는 공간인 시설은 죽음권력의 성격과 보다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아감벤은 시설의 죽음권력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가장 분명한 참조점을 제공해준다. 아감벤의 대표적 저작인 <호모 사케르>에 제시된 정식대로 호모 사케르란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죽여도 되는 생명’을 의미한다. 호모 사케르로 지정된 자의 생명은 죽여도 되는 생명, 살해해도 무방한 생명인 것이다. 동시에 그의 생명은 어떤 희생 제의의 제물로도 바쳐질 수 없다. 즉 그는 어떠한 종교적 차원의 성역에도 진입할 수 없다. 그래서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의 형상에서 이중적 배제를 읽어낸다.

고대 국가체제를 구성하던 두 축이었던 정치와 종교로부터 동시에 배제된 존재가 바로 호모 사케르다. 그렇다면 도대체 호모 사케르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의 본질은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말한다. 벌거벗은 생명을 통해 그가 강조하려는 것은 인간의 존재가 단지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최소의 자연적 생명현상과 동일화되어버린 상태다. 인간을 다른 생명체, 가령 동물과 구별되는 모든 특성을 상실한 존재가 바로 호모 사케르라는 것이다.

아감벤에게 호모 사케르란 항상-이미 주권의 고유한 상관자다. 즉 주권의 비밀은 호모 사케르란 형상의 의미를 포착할 때만 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아감벤은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라는 슈미트의 정식을 따라 주권을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권력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예외상태란 무엇보다 정상적인 법질서가 법에 의해 중지되는 사태다. 예외상태가 주권자에 의해 선포되면 법이 보장하던 모든 시민의 기본 권리들이 유보되고 중지된다. 법에 의한 법적 권리의 중지라는 역설적 상태가 도래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정치적 공동체 이전에 존재하는 순수한 생명체로서의 삶이 드러난다. 그것은 단지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생명, 즉 벌거벗은 생명이다. 결국 아감벤에게 주권이란 바로 시민적 존재를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 수 있는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권이 예외상태를 선포하는 권력이라는 말은 곧 주권이 시민의 자격을 박탈한 채 그저 생물학적으로 생존하기만 하는 삶, 즉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보유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권은 정치적 권리에 의해 규정되는 시민을 철저한 권리-없음의 상태, 단지 살아있다는 사실만을 자신의 유일한 토대로 가진 무기력한 존재로 만드는 권리의 바탕으로 작동할 수 있는 권력이다. 다시 말해 주권이란 근본적으로 시민의 자격, 즉 정치적 권리를 무화할 수 있는 힘, 시민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 수 있는 힘에 기반하고 있는 권력의 형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권의 이러한 성격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의 정치적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차원이다.

이와 같이 아감벤은 예외상태를 통해 벌거벗은 생명을 창출함으로써 통치의 토대를 구축해가는 주권 정치의 근본적 모델을 수용소라고 본다.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야말로 근대적 의미의 호모 사케르들을 창출함으로서 주권적 예외상태를 정상적인 정치질서로 만들어가는 주권의 본질적 원리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였다는 것이다. 수용소에 갇혀 더 이상 아무런 시민적 권리도 보유하지 못한 채 단지 생명체로 환원된 유태인에게 호모 사케르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한 우리는 이와 같은 호모 사케르의 모습 속에서 시설에 유폐된 자격을 박탈당한 자들의 어떤 형상을 목도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시설은 시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설이 시민의 권리, 사회구성원으로서 자격을 박탈하는 권력의 작동방식에 의해 규정된다면, 그리고 그러한 권력이 ‘죽음에의 강제’라는 방식으로 작용한다면 시설은 단지 시설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대한민국의 곳곳에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 채 국가와 자본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수많은 이들을 목도해왔다.

강제철거에 맞섰던 용산 남일당의 철거민들, 폭력적 방법으로 정리 해고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 송전탑 건설로 삶이 파괴되는 밀양의 농민들, 그리고 강정마을의 주민들 등 현재 대한민국 전역에는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권리 없음의 상태로 추방당하는 이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들은 자기 땅에서 난민이 된 존재이며, 삶을 돌보는 권력으로부터 그러한 돌봄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배제된 자들이다. 실질적으로 권리와 자격을 박탈당한 채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비록 현실의 시설 밖에 거주할 지라도 그들이 거주하는 그 장소가 곧 시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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