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규찬 / 공공미디어연구소 이사장

학문적 작업의 출발점은 개념이다. 개념을 제대로 세우고, 못쓸 개념을 과감하게 폐기하며, 필요하다면 새로운 개념을 고안하는 일이다. 그 예로 필자는 국가를 앞세우는 ‘국민’이라는 단어를 거부하고, 개인이면서 대중의 일원인 ‘나’의 사회적 존재성을 드러내기 위해 ‘인·민’이란 말을 사용한다. ‘언론’이라는 개념은 “인·민 대중이 자신의 의사를 공공연히 드러내고, 타인들과 더불어 공개적으로 토론을 펼치는 민주적 정치활동과 합리적 정치과정”으로 정의한다. 언론은 그래서 결코 ‘조중동’이나 <MBC> 같은 매체가 될 수 없고, 언론인을 <경향신문> 기자나 <KBS> 교양피디들로 환원할 수도 없다. 칸트가 말하는 ‘이성의 공적 활용’ 행위가 다름 아닌 언론이며, 바로 그렇게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언론인이다. 요컨대 언론이 곧 정치고, 언론인 되기는 그 정치의 주체가 되는 것을 뜻한다.

억압된 소통,  치안 스테이트의 징후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라는 짤막한 대담집에서 주디스 버틀러는 ‘스테이트’(state)라는 영어 단어를 ‘국가’와 ‘상태’라는 이중적 의미로 풀어낸다. 이 글에서는 그 중의적 유용성을 분명히 할 목적으로 그냥 ‘스테이트’라고 적겠다. 여기에 랑시에르가 ‘정치’에 반하는 것으로 내세우는 ‘치안’(security)이라는 개념과 결부시키면, 현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확립되어 가는 신보수/신자유주의 통치 상황을 ‘치안 스테이트’로 규정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치안을 경찰조직 혹은 경찰의 진압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치안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정치의 출현을 막는 ‘감성 분할’에 있다.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 들을 수 있는 것과 들을 수 없는 것, 그리고 표현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를 나누는 것이다. 바로 ‘대중교통양식’(mass communication) 규정의 행정이자 통치다.


용산사태를 치안 스테이트의 결정적 증거로 파악하는 것도 단순히 진압경찰이 무고한 인·민을 살상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치안 스테이트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잉여적 삶’ 혹은 ‘사회적 홈리스’들을 쓰레기 처리하듯이 대하는 국가권력의 횡포, 조르조 아감벤이 가리키는 ‘벌거벗은 삶’ 또는 ‘호모 사케르’들에 대한 자본권력의 일방적인 테러 차원을 넘어선다. 오히려 치안 스테이트의 핵심 징후는 철거 세입자들이 강요받다시피 한 ‘저항’이라는 최종적 커뮤니케이션을 ‘테러리즘’이라 규정하는 한나라당 의원들의 권력에서 우선으로 나타난다. 화염으로 폭발한 신자유주의 국가의 ‘사회 안보’ 위기 문제를 연쇄살인범에 의한 ‘개인 안전’ 위험 프레임으로 대체하려는 청와대의 통치 의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에 조응하듯 경찰이 보여주는 것 외에는 보여주지 않고, 검찰이 말하는 것만 따라서 말하며, 권력이 표현하고자 하는 현실을 재현하면서도 대중들의 표현은 억압·차단하는 <KBS>를 비롯한 주류매체가 바로 치안 스테이트 구축의 핵심이다.   
노암 촘스키가 말하는 우익 플래크(flak)들의 공공연한 파시즘적 준동, 비판적 학계와 지식인 사회의 무기력증, 정책홍보가 수준에 이른 일부 ‘전문가’들의 기생적 활약 그리고 이와 연계된 국가권력의 체계적 여론조작 등을 고려하면 지금의 한국사회는 ‘통합적 치안 스테이트’라고 이름 붙여도 크게 무리가 아닌 상황에 이르렀다. ‘감성 분할’이라는 말로 충분히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자유로운 ‘교통대중’(communicative masses)에 의한 ‘민주적 대중교통’(mass communication)의 정치가 이미 위험에 처했으며, 자유언론/언론자유의 헌법정신에 기초한 아래로부터의 여론·합의·대의 체제로서의 민주공화국은 이미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탈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경제위기와 언제 촉발될지 모르는 한반도의 군사위기를 고려할 때 치안국가가 더욱 강화되고, 치안 상황이 훨씬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정권 초기에 수사적으로나마 강조되던 ‘소통’이라는 말을 요즘에는 거의 듣기 어렵다는 사실을 결코 사소히 볼 수 없다.

왜 한나라당은 미디어법에 집착하는가

 


대중여론과 상관없이 가겠다는 대통령이다. 작년 말부터 정권이 집요하게 추진한 사이버모욕죄를 신설한 정보통신망법을 비롯해서 방송법, 신문법 등 언론·미디어 법안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철회하는 게 마땅하다는 여론이 60%를 넘었다. ‘악법’이 아닌 ‘약법’이라는 한나라당의 집요한 선전, 정권의 적극적 홍보에도 불구하고 악법은 악법이라는 대중의 판단은 전혀 바뀌지 않은 것이다. 이에 기초해 ‘미디어행동’ 등 시민사회운동 진영은 ‘사회적 합의’의 필요성과 사회적 합의기구 구성의 절차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렇게 하는 게 지난 국회에서 있었던 물리적 충돌을 피하고, 중대 사안에 대한 대중 판단과 민의 소개의 기본권을 획득하며, 무리한 일방주의를 막아내고 민주적 정치 가능성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법과 제도에 의한 자유언론 차단 및 대중교통 봉쇄의 치안 스테이트 악화를 막아내는 수세적 전략이었으며, 동시에 정치 스테이트로의 전환을 시민사회가 추동하는 공세적인 전술로 제안되었다.


국가권력은 자유언론을 무단검열하고 대중교통을 불법으로 통제하지 않음으로써 ‘공권력’이라는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또한 ‘법질서’를 내세워 합법적으로 대중교통을 막고 언론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물론 무단으로 교통 흐름을 왜곡하거나, 불법적으로 교통을 방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안전한 경로로 법에 기초해 ‘정당하게’ 자유언론, 대중교통을 통제하는 것이다. 행정과 통치로서의 치안 스테이트는 바로 이런 사회교통 통제시스템의 법제화 여부에 달려있다. 이것이 촛불대중의 정치적 역능에 공포를 느낀 현 정권이 언론·미디어악법 통과에 몰두한 이유며, 공포의 권력에 맞서 대중의 자유로운 정치적 시공간을 재구축해야 할 운동진영이 이를 저지하는데 집중하는 까닭이다. 9.11 이후 미국 민주주의의 후퇴도 부시의 무단통치 때문이 아니라 공황의 분위기에서 대중들이 방심할 때 통과된 ‘애국자법’을 통해 합법적, 제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된다. 법과 제도가 언론탄압을 보장하고, 선전권력을 보호하며, 치안 스테이트를 수호하는 패러독스가 바로 지금 여기에 만연해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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