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영 / 서울대 지구환경시스템공학부 박사

  앙리 르페브르는 20세기를 살다간 프랑스 사회학자로서 후기 자본주의의 특성과 모순에 관심을 가졌다. 동시대의 철학자 또는 사회학자들이 후기 자본주의의 모순과 특성을 생산ㆍ계급 영역에서 찾은 반면, 그는 재생산과 소비주체의 영역에서 찾으면서 일상공간의 문제에 남다르게 주목했다. 그 결과 공간문제를 통해 후기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규정되는 존재와 가치의 의미를 재구성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이 글에서 필자는 르페브르가 왜 일상공간에 주목하는가, 어떻게 공간을 규명하고 있는가, 어떠한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는가 등을 살펴봄으로써 도시공간을 이해하는 데 유효한 시각을 소개하고자 한다.

왜 일상공간에 주목하는가

  인간의 소외문제는 그 시기 학자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인간은 소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고, 듣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과 같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그것이 가능하지 않게 될 때 인간은 고립되고 소외된다. 반면 인간은 인간의 본질과 삶을 감각적으로 전유할 수 있을 때 무엇으로부터도 소외되지 않는 총체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르페브르는 여타의 맑스주의자들과 달리 이러한 감각적 만족이 사회주의적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이 곧바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그의 사상과 활동에 방향성을 제공해 주었다. 즉 실천으로 미래를 바꾸고자 한 것이다. 르페브르는 실천을 통해 인간은 자신과 함께 외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러한 실천의 장으로서 일상공간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맑스주의 전통을 잇는 학자들은 후기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삶은 노동과정뿐만 아니라 재생산 과정, 즉 물신화되고 상품화된 일상생활로부터도 소외된다고 본다. 하지만 르페브르는 관찰을 통해 일상생활의 이면에는 소외를 극복하는 ‘자발적인 순간’들이 있음을 발견했다. 억눌린 저항에너지가 폭발하는 ‘축제’ 등이 바로 그러한 순간들이다. 그는 일생생활에서의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재생산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일상성을 폭로하고 비판하며 변화시킴으로써 탈 소외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라고 생각했다. 즉 일상은 기술적 합리주의와 자본주의에 의해 조작되고 통제되기도 하지만, 자발적인 재생산에 의해 변화되기도 한다. 그는 이와 같이 지배와 저항이 공존하는 확고한 실체로서 일상생활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거대구조와 지배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고 믿었다. 억압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수동적 장으로 치부되었던 일생생활에서 거꾸로 사회변혁의 능동적인 힘을 찾아낸 것이다.
  1963년 프랑스에서는 2차 대전이 끝난 뒤 1950년대 베이비붐과 함께 급격하게 늘어난 파리의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해 신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의 공간이론은 어린 시절의 고향이면서 여름을 보내던 오래된 중세도시 나바렝스와 ‘무(無)’에서 생겨나던 신도시를 비교하면서 체계화된다.
  르페브르는 생활을 위한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신도시에서 오히려 공포감을 느꼈다. 합리적인 이성에 의해 구획된 기능적 공간에서 인간은 강제되고 파편화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수학적 정밀함에 의해서 계획된 신도시는 인간의 소외를 극복하게 하는 자발적 생동감이나 창조력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공간은 수천 년에 걸쳐 생산된 공동체의 다양한 형태와 활동에 비해 단조롭고 따분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나바렝스의 거리와 건물, 광장과 통로, 스타일과 기능은 일종의 통일성이 있으면서도 활기가 넘쳤다. 그곳의 거리는 단순히 사람들이 이동하는 황폐한 통로가 아니라, 산책하고 수다 떨고 활동하기 위한 의미 있는 장소로 사용됐다. 그곳은 비록 경제적으로는 쇠퇴했을지라도 단기간에 계획된 20세기 신도시와는 달리 생명력이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는 생명체와 거주지와의 관계에 의해 발생한다. 나바렝스와 같은 곳은 거주지의 형태가 미리 정해지기보다, 생명체의 자유로운 성장과 ‘종이 살아가는 방식’에 민감하고 유연하게 대처할 때 가능하다. 거주민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거주지의 형태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서서히 전체로서 완성되어 간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전체로서의 거주지는 기능적 질서를 따르면서도 다양성을 갖추게 된다.

공간 생산론

  르페브르는 <공간의 생산 The Production of Space>(1974)에서 ‘공간적 실천(spacial practice, perceived space)’, ‘공간의 재현(representational of space, conceived space)’, ‘재현의 공간(representational space, lived space)’이라는 세 유형으로 공간을 개념화했다. ‘공간적 실천’은 인간의 활동을 통해 형성된 지각공간을 의미한다. 즉 일상생활이나 상식적인 감각으로 인지되는 일상적 공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각공간에는 대중적인 행위와 전망이 섞여 있다. 인간은 바로 이러한 일상에서의 반복적 공간 활동을 통해 사회적 삶을 구조화한다. 이 공간적 실천은 수동적이기도 하며 자발적이기도 하다.
  ‘공간의 재현’이란 도시계획가, 기술관료 등의 전문가에 의해 계획된 공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간은 합리적 이성과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것은 직접 생산관계와 그 관계에 부과된 질서와 연결된 것으로서 사회의 지배적인 공간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간은 앞의 신도시와 같이 지배 권력의 목적에 따라 몇몇에 의해 단기간에 구상되기 때문에 일상의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자발적 순간들을 허용하지 않는다.
  ‘재현의 공간’은 규범화된 공간의 재현과 충돌하는 공간적 실천들이 행해지는 공간이다. 즉 수동적 경험으로 점철된 일상생활의 공간실천으로부터 저항적이고 차이를 생산하는 실천으로서 재현의 공간을 찾아냄으로써 공간생산의 능동적 주체가 탄생한다. 이러한 공간 실천을 통해 지배적인 질서와 권력화된 사상들이 비판되고, 개인은 사회집단과 관계를 맺고 스스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총체적인 인간으로 삶을 전유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 능동적인 공간적 실천의 힘은 현실적 경험에 근거한 인간의 상상력에서 기원한다. 상상력은 창조의 근원이며, 해방을 갈구하는 욕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르페브르가 <공간의 생산>에서 공간 생산의 계기로 제시하고 있는 개념들은 구분되어 있지만, 그 의미는 명확히 구분되기보다 일정부분 겹쳐져 있다. 이는 공간 자체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패권을 장악하는 주체들의 의도에 따라 끊임없이 전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르페브르는 이들 개개의 역할보다 변증법적 상호관계의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르페브르가 19세기 중반에 목격한 신도시들은 21세기에 장소를 바꿔 이곳 한국에서도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오랜 기간 사람들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유기적으로 변화해 온 기존의 시가지들이 자본과 기술의 논리에 따라 급격하게 재편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때로는 ‘도시미화’라는 이름의 공간생산 활동들이 일회적으로 행해지고, 이와 같은 계획적 도시정비 사업을 통해 우리의 일상공간은 또다시 생명력을 잃고 무미건조해지곤 한다.
  르페브르가 채택한 방법론상의 문제에도 불과하고, 그의 공간에 관한 사유는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의 계기들을 일상생활 속에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중요하고 유용하다. 이를 통해 위와 같은 공간생산 활동들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비판하고, 집ㆍ거리ㆍ학교ㆍ시장 등과 같은 일상생활에서 전일적인 인간의 삶을 회복하기 위한 실천적 대안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전망해 볼 수 있다. 그러한 실천적 대안은 규정된 그 무엇이 아니라 생명체와 거주지와의 상호관계에 대한 관찰과 비판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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