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한별 / 서울대 도시설계협동과 박사과정

자신의 심장을 쐈던 기 드보르가 5년 후 개봉된 <매트릭스>(1999)를 통해 ‘스펙터클’이 되어 돌아왔다고 하면 적당한 표현이 될까? 영화가 검은 가죽재킷을 입은 키아누 리브스의 요가동작 같은 움직임과 환상적인 영상기법, 그리고 ‘매트릭스’라는 존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불러일으킨 사이, 모피어스로 환생한  드보르는 어쩌면 영화관객들이 자신을 보고 있는 스크린을 폭파할 궁리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네오가 깨부수려던 가상의 현실 매트릭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도시와 다름 없다는 것이 바로 드보르가 직시하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빨간 알약으로 매트릭스를 비교적 간단히 벗어났던 네오와 달리 드보르에게 그런 알약은 필요치 않았다. 종국에는 자신을 스스로 죽였던 것처럼, 그 자신이 스펙터클이 되기를 끊임없이 거부했던 삶 자체가 그 알약을 대신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만든 영화 <사드를 위한 울부짖음>에서도 “영화는 없다. 영화는 이제 죽었다”고 단언했었다.
그에게 저항의 대상이 되었던 스펙터클은 영화 속의 네오가 그 존재를 의식하고 파괴하려했던 매트릭스만이 아니다. 드보르는 어쩌면 매트릭스가 사라지고 난 세상이 더 좋을 것이라는 단순하고 암묵적인 기대를 애초부터 부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 속 인물 중에서 드보르의 맞수는 매트릭스의 인공지능, 스미스가 아니다. 네오가 극복한 것처럼, 스미스는 적수가 되지 못한다. 외려 기계세상의 현실을 알면서도 스펙터클의 노예를 택했던 사이퍼의 선택이 더 강력한 도전이다. 매트릭스의 존재 자체가 삶의 현실이고 그 너머의 기계세상과 기계의 ‘배터리’가 된 인간들의 모습 자체도 현실이지만, 사이퍼는 그 실상을 알면서도 결국 기계가 주는 전기신호 세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매트릭스 세상을 파괴해야 한다는 것도 또 다른 이데올로기일 뿐이므로 어쩌면 노예적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그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자일 수도 있다. 사이퍼의 선택이 던졌던 질문은 ‘왜 우리는 비참한 현실을 감추는 달콤한 환상 속에서 살면 안 되는가’이다.

스펙터클의 시간, 스펙터클의 도시

맑스는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노동할 때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노동자의 소외를 말했다. 더 나아가 드보르는 노동자들이 일하지 않을 때조차도 분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자본주의는 노동시간 이외에도 상품의 소비를 위해서 일상적인 삶의 시간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데이트도 상품의 소비가 매개되고, 여가도 상품의 소비로 해결된다. 역사도 박물관과 책으로 소비되는 상품이며, 가장 창조적 행위인 예술마저도 미술관에서 구입하는 상품이다. 우리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상의 행위가 눈앞에 상품으로 제시되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방식이 가능할지 모를 정도로, 일상적 삶의 시간은 상품의 소비로 철저하게 조직되었다. 아직 상품으로 포획되지 않은 욕망이 조금이라도 발견된다면, 자본주의는 그 욕망을 ‘새로운 시장’으로, 욕망의 대상을 ‘새로운 상품’으로 전환해내는 능력을 즉각 발휘한다. 그렇게 확장되고 축적된 상품은 “풍요”의 이미지로 “소비의 자유”라는 환상을 전달함으로써 우리의 일상을 재조직한다. 우리가 가진 자유시간의 ‘자유’는 상품매트릭스가 우리의 뇌에 전달해 주는 신호의 이미지일 뿐이다. 일상적 삶의 시간은 스펙터클에 의하여 상품소비를 위한 “소비시간”과 노동시간 이외의 “사회적 노동(우리는 일을 위한 교육을 받고, 아이들이 훌륭한 노동자로 성장하도록 교육하고, 내일의 노동을 위해서 피로를 풀고, 더 나은 노동의 대가를 위해 예속적인 인간관계에 매진한다)”으로 예속되는 것이다.
시간 매트릭스는 도시에서 공간의 재조직으로 구체화된다. 자본주의 도시의 일상적 생활의 주기에 따라 우리가 이동하는 생산을 위한 공간, 소비를 위한 공간, 재생산을 위한 공간으로. 드보르에게 르코르뷔지에와 같은 근대 도시계획가들이 주장한 도시주의는 자본주의적 시간분리를 공간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분리의 테크닉”이었다. 도시주의는 상품의 생산과 소비의 시간을 기능적인 단위들로 잘라내는 “토지의 조직”이다. 진정한 삶의 “품격과 독립성을 가진 장소”인 거리를 자동차(자유의 이미지를 가진 상품)를 위한 도로가 대체하면서, 노동자들은 교외에 집단적으로 고립되고 산재된 채로 상품·시간 스펙터클로 재조직되었다. 그것은 고층건물과 도로, 중심과 분리된 주거지역으로 구성된 도시공간으로 물화되어 총체적인 자본주의 도시 이미지로서의 ‘도시 스펙터클’이 된다. “스펙터클은 하나의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이다.”

매트릭스 전사(戰士)

드보르에게는 자신의 일상적 삶이 도시 스펙터클의 전복을 가져오는 무기였다. 이미 스펙터클이 되어가는 파리의 도시 구석구석을 표류하면서 장소 고유의 감각과 의미들을 찾아내고, 점거, 구조물 짓기, 낙서 등을 통해서 도시적 맥락을 재점유했다. 그것은 도시 스펙터클에 대한 대응으로서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Situationist International)의 활동이었다. 상황주의자들은 일상적 삶이 일체화되는 도시로서의 일원론적인 도시계획을 주장했고, 자본주의 도시의 스펙터클을 전복하기 위해 우회(d럗ournement), 표류(d럕ive), 무단점거(squat), 상황구축(constructed situation), 은어(argot) 등의 전술을 사용했다. 드보르가 만든 파리의 심리지도는 직접 파리의 구석구석을 탐험하고 의미를 찾아다녔던 주관성을 바탕으로 재구축한 공간이며, 그것이 그가 사랑했던 파리의 현실적 공간인 것이다. 드보르를 위시한 상황주의자들이 1968년의 학생투쟁을 직접적으로 촉발시켰던 <학생 삶의 빈곤함>(1967)에서는, “자유롭고 구축된 삶”, “모든 가치와 행동 패턴들의 자유로운 재구축”, “새로운 문화의 생산자들을 자율적으로 조직하기”, “강제된 노동과 수동적인 여가의 분리를 폐기하기”, “창조성”, “사회적 삶의 자유로운 재구축”, “노동을 자유로운 활동으로 대체하기” 등이 제시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새로운 의미로 재조직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드보르의 주장과 삶은 사이퍼의 단순한 이분법과 다르다. 매트릭스를 넘어선 곳에 완전한 사회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매트릭스의 존재를 폭로하고 그것을 거부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세계의 삶이 기계세상이 주는 달콤함을 똑같이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까지도 드보르에게는 실재한다. 허위의 이미지인 매트릭스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의 내용과는 분리된 인간의 실제 삶의 존재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스펙터클에 더 가깝다. 그래서 영화 속 구체적 사물로서의 매트릭스는 드보르에게 저항의 정확한 지점으로

서의 스펙터클과 완전히 같을 수 없다. 드보르가 정면으로 맞섰던 ‘스펙터클의 사회’는 우리가 존재하는 현재의 세상, 자본주의 도시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삶이 가진 분리와 소외구조 자체다. 영화 속 매트릭스는 겉으로는 실제의 삶을 은폐해서 분리의 이미지를 띠고 있지 않지만, 자본주의 도시는 그 자체가 소외와 분리를 ‘이미지화 한 축적물’이다. 그것이 드보르의 스펙터클이다. 매트릭스와 닮은 점이 있다면 그 이미지의 허구성을 감추려하는 인공지능(자본)의작용(소비문화, 미디어)과, 분리와 소외의 현실을 인지한 사람에게 열리는 탈출구의 존재이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