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 / 영화평론가

10여 년 전에, 10여 년 후를 내다보고 찍은 듯한 영화 <301·302>를 보는 것은 다소 소름끼치면서도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다. 설치미술가 최정화가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은 영화 속 301호와 302호 아파트의 공간은 마치 07년 지금 많은 싱글족들이 살아가는 모던하고 화려한, 그래서 더욱 고립된 느낌의 원룸들을 연상시킨다. 공간 미학으로 볼 때 이 영화는 10년 정도 빨리 나온 영화이며 95년에 07년의 近미래를 그린 기묘한 SF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루는 얘기와 주제만도 그렇다. 여성들의 몸에 대한 강박증, 거식과 폭식을 오가는 음식에 대한 노이로제, 욕망과 충족의 적절한 변화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섹스에 대해 무조건적인 공포심을 갖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과다한 욕구에 시달린다는 이야기는 10여 년 전보다는 지금이 더 어울리는 느낌이다.

음식, 소통의 기제이자 장애물
301호에 사는 여자(두 인물은 영화 내내 301, 302라는 기호로 익명화, 일반화된다)는 요리일기를 쓸 만큼 음식 만들기에 강박증을 갖고 사는 여자다. 그녀는 결혼 전 비교적 괜찮은 몸매를 가지고 있었으나 남편을 ‘먹이는’ 일에 열중하다 폭식증에 빠지고 결국 ‘비만-결혼생활의 권태-남편의 외도-이혼’의 과정을 겪은 인물이다. 그녀의 집 건너편에 사는 302호 여자는 그 반대다. 그녀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지만 지금 당장은 여성지에 다이어트와 섹스비법의 하찮은 글을 쓰면서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녀는 301호와 달리 어떤 음식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식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바깥 세상과는 철저하게 담을 쌓은 채 살아간다. 그녀를 외부와 연결시키는 것은 전화응답기와 팩시밀리 정도일 뿐이다.
 이 둘이 음식에 대한 상반된 정신적 외상을 갖게 된 것은 모두 과거의 상처 때문이다. 정육점 집에 입양돼 자란 302호 여자는 어린 시절 양아버지의 성적 학대를 받으며 살아 왔던 인물이다. 시뻘건 고기를 썰던 아버지의 손은 밤마다 그녀의 치맛속으로 파고들었으며, 때문에 그녀에게 있어 ‘고기=음식’은 자신의 몸이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불결한 욕망과 같은 것이 됐다. 302호 여자가 거식증만큼 ‘석녀’의 생활을 이어가는 건 그 때문이다.
301호 여자는 음식에 대한 욕망만큼 섹스에 대한 욕구가 넘쳐났던 인물이다. 그녀는 뚱뚱해짐으로써 남편으로부터 섹스를 거부당한데다 남자가 다른 젊은 여자와 카섹스를 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 그 분풀이로 그가 애지중지하는 강아지를 죽인 후 요리를 해서 먹인다. 그 일로 이혼을 당한 그녀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음식을 만드는 일로 해소하려 애쓴다.
음식을 남에게 먹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여자와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는 여자의 만남과 충돌, 그 결과는 예상되는 수순을 밟는다. 이 둘에게 있어 음식은 곧 소통의 유일한 기제이자 동시에 결정적인 장애물이 된다. 한 사람은 음식을 계속 만들고, 한 사람은 그 음식을 계속 토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둘은 서서히 상대의 상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302호가 스스로 301호의 음식이 되려는 것, 301호가 결국 302호를 요리하는 것은 엽기적이고 과격하지만, 무엇보다 매우 관념론적이지만, 여성들이 서로의 문제를 공유하고 확장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에 있어서 결코 비극적인 결말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고 보여진다.

계급문제와 여성문제의 결합 부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301·302>를 성공적인 여성주의적 영화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영화 속 여성 두 명이 겪게 되는 모든 문제가 왜 꼭 ‘음식=섹스=어린 시절의 강간 혹은 과거의 성적 상처’로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영국의 영화평론가 로빈 우드의 “사회주의로 가는 길은 경제 관계와 함께 성적 관계를 거쳐야 한다”는 얘기처럼 영화가 꿈꾸는 진정한 사회변화는 그 두 가지, 곧 계급문제와 여성문제의 유기적 결합에 기반할 것이다. 성적인 문제만이 지금의 모든 여성문제를 만들어 내는 결정적 요인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301·302>는 사회구조적 문제의식보다 여성 커뮤니티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카테고리의 문제에만 천착한, 다소 편향된 작품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건 이 영화를 만든 박철수 감독이 계급의식이 결여돼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것조차 다분히 의도된 것이었을까. 확인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으나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만들어진 95년의 시대상황이, 영화를 포함한 모든 문화 분야의 작가들로 하여금 거대담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의식적으로 미시적인 관찰에 치중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세상은 과거의 민주화세력이 3당 통합이다, 권력형 비리다 뭐다 해서 사분오열됐으며 경제는 점점 IMF로 치닫고 있던 상황이었다. 과속으로 달려오던 한국형 자본주의가 몰락하고 급격한 양극화의 전조가 엿보이던 시기, 영화계 역시 양적으로는 점점 더 팽창해 가고 있긴 했으나 내적으로는 새로운 돌파구가 요구되던 시점이었다. 수입영화가 양적으로 엄청나게 확대돼 시장의 전체 볼륨은 마치 301호 여자가 차린 각종의 음식마냥 커지고 다양해졌지만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로 마치 302호 여자마냥 점점 더 그 음식을 먹기가 힘들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결국 새로운 영화, 새로운 방식의 영화에 대한 고민이 요구되는 데다 과거의 삶을 움직였던 거대한 사회적 담론이 강제적으로 해체되던 시대에, 그것에 대한 환멸과 거부감이야말로 박철수 감독으로 하여금 사회구조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기묘한 서사와 화법의 영화를 만들게 했던 셈이다. 영화에서 두 사람은 종종 아파트 문구멍으로 복도 건너편 상대편 집을 훔쳐본다. 그 보안구멍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마치 작은 외눈 망원경으로 보는 것처럼 동그랗게 좁혀져 보인다. <301·302>는 그렇게 의도적으로 세상을 좁게 보기를 원했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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