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호 [시사기획] 신자유주의의 본질과 신사회운동-④페미니즘이 바라본
2003-04-04 15:11 | VIEW : 33
 
168호 [시사기획] 신자유주의의 본질과 신사회운동-④페미니즘이 바라본 신자유주의
여성없는 새로운 세상은 없다

최전승민 /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여성억압의 근원에 대한 치열한 논쟁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페미니즘 이론과 여성운동은, 21세기 최대의 화두 ‘세계화’의 도전 앞에 다시 한 번 활발해지고 있다. 지금 여성에게 ‘세계화’가 그토록 중요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갖는 여성에 대한 적대성 때문이다.

축적의 위기에 직면한 자본은 생산기지를 값싼 노동력이 산재해있는 곳으로 옮겨 비용을 최소화하는 한편, 금융 시장에서의 ‘투기 게임’을 통한 이윤증식으로 위기에 적응하고자 한다. 국가는 탈규제화, 시장의 자유화, 공공서비스의 사유화, 노동의 유연화 그리고 공공재정 감축을 통해 축적 양식의 전환을 순조롭게 해준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이 젠더(Gender)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성과 남성에게 현저히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여성주의자들로 하여금 주목하게 한다. 하지만 단순히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사후적 ‘효과’ 만의 문제는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에 있어 젠더적 역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기존의 주류 및 급진 경제학을 비판하고 자본의 흐름 자체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여성억압의 요소들을 규명하는 일이다. 즉 자본이 사적 영역에서의 여성의 무임금 노동을 효과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여성 및 전체 노동계급의 임금을 압박하는 현실과 자본이 남성 노동자들 간의 ‘남성적 협상’을 통해 여성을 배제시키는 계급 관리를 효과적으로 유지하고 있음을 밝혀내야 한다.

여성 억압의 요소 규명 중요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내줄 것이라고는 삶의 터전과 자기 몸밖에 남지 않은 제3세계 여성에게 더욱 가혹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현재의 신자유주의는 자본과 여성 억압의 역사 진행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신자유주의는 양적인 측면이나 질적인 측면에서 여성 노동에 대한 억압을 한층 더 강화하고 있다. 언론에서는 여성의 경제활동이 증대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세계 노동력 구성에 있어서 여성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고, 필리핀의 경우 경제활동인구의 70% 이상이 여성이다.

노동시장으로 대대적으로 유입된 여성들은 사회적,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파트타임, 계약직, 파견직, 특수고용 등으로 미숙련, 단순직에서 일하고 있다. 전세계적 추정치에 의하면 여성노동자의 94%가 이러한 불안정 노동에 고용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도 이민 여성노동자들은 의류산업과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주된 노동력을 구성하고 있으며, 심지어 가내에서 초국적 기업들의 상품을 생산하기도 한다. 한국만을 보더라도 현재 전체 노동인구의 거의 절반이 여성이고 고용된 여성 중 약 70%가 비정규직이다. 전세계적으로 여성의 임금은 남성의 75%에 불과하다.

그런데 여성노동의 불안정화는 임금과 고용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체 노동자의 90%가 여성인 수출자유지대(EPZ)에서 20세 안팎의 여성노동자들은 많은 경우 가족 전체를 먹여살리기 위해 극도로 낮은 임금, 장시간 노동(1일 12-14시간), 위험한 노동조건과 일상적인 성폭력에 노출된 채 일하고 있다. 이 여성들은 심각한 영양실조, 생리 불순과 심지어 비정상적 출산, 각종 질병과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는 등 건강권 훼손을 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비공식 서비스 산업으로 유입된 여성들은 기본적인 권리가 짓밟히는 것은 물론이요, 비공식 서비스 부문은 대부분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노동이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전인격적 착취가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현재 매년 4백만 명이 성매매에 유입되고 있으며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젠더(Gender)편향적인 신자유주의 넘어서라

요즘 들어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빈곤의 여성화’, ‘노동계급의 여성화’ 개념은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여성의 상황을 집약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여성주의적 대안의 절박함과 ‘여성화된 프롤레타리아트’가 신자유주의의 매우 중요한 저항 주체임을 동시에 말해준다. 이제 민주노조를 쟁취하자는 동남아시아 수출지대 여성노동자들의 외침, 에이즈와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아프리카 여성들의 울부짖음, 농민생존권과 식량을 보장하라는 남아메리카 원주민 여성들의 분노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은 일국적 수준에 머물지 않고 전지구적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성들은 3·8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으로 “여성이 멈출 때 세계가 멈춘다”라는 슬로건으로 독자적인 파업을 조직했다. 150여 개국 여성들이 연대하여 ‘세계여성행진’을 성사시키면서 시애틀, 워싱턴, 프라하, 퀘백, 제노바 등 전세계 투쟁의 현장에서 명실상부한 저항 블록을 형성해가고 있다.

지난 2월초 브라질에서 개최되었던 세계사회포럼에 대대적으로 참여한 여성들은 투쟁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나가는 과정에도 여성 스스로가 적극적인 주체임을 증명했다. 이 자리에서 여성들은 여성과 민중들에게 질곡이 되고 있는 국제 금융 기구와 외채위기의 구체적 영향을 분석했다. 아울러 다양한 고용 형태에 처해있는 불안정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포럼에서는 IMF, 세계은행과 WTO의 해체, 제3세계 외채의 탕감, 금융거래에 대한 과세, 구조조정 중단, 전쟁과 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대처, 유엔의 보다 적극적인 개입을 당장의 과제로 제시했다.

기존 여성주의가 비껴가곤 하던 경제학 분야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여성주의 경제학자들은 기존의 경제학을 비판하고 여성의 노동과 가치를 가시화하는 대안적 경제학을 고민하면서 경제 성장과 사회적 관계를 평가하고 측정하는 새로운 기법과 경제지표를 개발하고 있다. 한편, 지역공동체에 기반한 지속가능하고 환경친화적인 대안적 생산 및 유통 체계 구축 등을 현장에서 직접 실험하는 여성주의자들도 늘어나고 있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대안 체제에 대한 총체적 전망을 담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복원’ 모습도 드러내고 있다.

어떠한 이론적 편향을 갖든, 중요한 것은 중산층적 가치와 제도권에 편입되어 대중적 힘을 잃어버린 기존의 여성운동이나, ‘노동의 여성화’나 ‘빈곤의 여성화’라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젠더편향적’ 사회주의 운동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보다 전면적으로 맞서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부장적 자본주의, 그 자체에 맞서는 보다 급진적인 여성주의 이론과 여성해방 전략일 것이다. 그리고 이미 여성들의 저항은 시작되었다는 점에 대한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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