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호 [아웃사이더]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2003-04-04 15:13 | VIEW : 28
 
168호 [아웃사이더]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규식 / 노들장애인 야간 학교 학생

나는 장애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 어머니가 임신하셨을 때 연탄가스를 마셨고 그로 인해 나는 뇌성마비 장애를 갖게 되었다. 어렸을 때 나는 늘 먹고 자는 일만 했다. 15살 되던 해 대학생 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 처음 집밖에 나왔다. 19살에 장애가 가벼운 친구를 만났고, 이 친구를 통해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교인들의 도움으로 일주일에 두 번 교회를 나가게 되었고, 처음으로 정기적인 외출을 하게 되어 참 좋았다.

첫 번째 공동체 생활은 20살 때 의정부에 있는 장애인 공동체에서였다. 그 곳에서 생활은 특별한 일 없이 먹고 자는 일만 반복하며 살아갔다. 장래가 보장되지 않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부모형제들의 눈치를 보게되고 다투면서 25살 때 두 번째 장애인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곳 생활도 매일 매일 똑같아 참으로 지겨웠으며 그 때부터 ‘혼자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 개인지도를 받으면서 혼자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모님 사업이 망하면서 나의 이런 소망은 무너졌다. 만 2년만에 다시 공동체 생활을 접고 여기저기 특별한 목적 없이 돌아다니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쓸데없이 돌아다니기만 할 것이 아니라, 뭔가 의미 있는 일로 돌아다녀야겠다! 뭐든지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29살 때 정립회관에 있는 노들야학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입학한지 20일만에 에바다 집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에 우리 장애인들은 아무런 힘도 없는데, 싸우기 위해 준비된 전경들과 마주치니 간이 콩알만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많은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이러한 집회를 몇 차례 경험한 이후에는 전경들과 싸울 수 있는 용기까지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1년 후에 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한 사건이 생기게 되었다. 99년 친구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 장애인편의시설인 지하철 리프트를 이용하던 중 안전하게 리프트에 올라가려고 노력하다가 앞바퀴가 약간 리프트를 지나쳤고 앞바퀴의 우발적인 진행을 막아줄 안전판은 전혀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결국 스쿠터와 함께 지하철 계단으로 곤두박질치는 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떨어지는 순간 ‘아이고! 나는 가는 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전치 3주의 부상만을 입었다.

사고 직후 노들야학을 중심으로 장애인단체들이 모여 대책위를 구성하고 서울시와 지하철공사를 상대로 ‘사고에 대한 책임을 규명하고 언론매체를 통해 공식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공식 사과를 받고 손해배상청구에서 승소하여 5백만원의 배상금을 받았다. 혜화역에 우리나라 최초로 양방향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던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지금 혜화역에 있는 엘리베이터는 투쟁으로 우리가 쟁취한 결과물이다.

2001년 5월에 노들야학 인권반에서 중증장애인들이 자립생활을 하는 비디오를 보면서 정말 깜짝 놀랐다. 나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20여년 동안 집에서 밥 먹고 잠만 잤고, 나머지 10년 정도는 공동체에서 밥 먹고 잠만 잤는데 선진국의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처럼 자신들이 가고 싶은 곳에 가고, 하고 싶은 일은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32년을 살면서 지금까지 나에게는 꿈이 없었다. 이제는 꿈이 생기고, 계획도 생기고 많은 것이 새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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