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호 [시사기획] 우리 시대의 혁명, 어떻게 가능한가 ② 혁명의 새로운 주체구성
2003-04-04 15:19 | VIEW : 31
 
170호 [시사기획] 우리 시대의 혁명, 어떻게 가능한가 ② 혁명의 새로운 주체구성
우리 시대의 프롤레타리아트, 우리 시대의 코뮨

이택진 / 다중문화공간 ꡐ왑ꡑ 회원

우리 시대(제국의 시대)의 주체성을 재구성하는 문제는 새로운 정치학을 구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정치학이 요구되는 것은 전문노동자와 대중노동자 시기의 혁명적 주체들이 우리 시대의 현대적 프롤레타리아트인 다중(多衆)을 조직할 힘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포스트모던니즘에서 이야기되듯 계급적대가 해소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 주체의 재구성이 더 이상 대의적인 방식으로는, 즉 산업프롤레타리아트 전위주의 혹은 합의주의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을 만큼 확장된 공장-사회라는 전사회적 계급 적대 관계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노동이 자본의 생산 및 재생산 과정에 실질적으로 포섭되어 사회 전체가 최종적으로 생산 속으로 흡수되는 우리 시대에는 적대 전선의 다층화, 다양화 다각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산업프롤레타리트 전위주의와 합의주의는 이 다각적으로 재구성된 주체들의 힘을 활성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제각각 투쟁의 중심으로 자리잡아야 할 다양한 주체들의 자기표현의 욕구를 앗아가는 것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선의 다층화가 주체의 다양화로
혁명의 역사는 코뮨의 부단한 재탄생의 역사이다. 종속적이며 억압받는 다수가 자신들의 삶을 자율적으로 경영하고자 하는 불복종적 힘은 1789년과 1871년에 파리에서 출현한 코뮨, 그리고 러시아의 소비에트, 헝가리와 이딸리아에서의 평의회 등으로 자신의 구성적 힘을 드러냈다. 코뮨의 구성 과정은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상향식 조직화 과정이었으며, 때문에 코뮨의 역사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치적 주체성을 재발견 혹은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1968년 이전의 모든 코뮨들은 삶을 노동으로 조직하는 대안적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코뮨주의에 대한 이러한 상상은, 코뮨을 만인이 노동자가 되는 사회로 이해하도록 한다. 일례로, 20세기 최대의 코뮨인 러시아 소비에트는 생산적 노동협동, 노동의 공동계획, 노동성과의 공동관리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1917년 러시아의 혁명이 노동자 계급의 삶이 지닌 불복종적 힘의 표출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소비에트가 점차로 삶을 노동으로 조직하는 행정 기구로 변했으며, 결국 국가에 흡수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처럼 혁명의 열망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1968년 혁명 이전의 코뮨들이 노동을 인류의 공통성, 인간의 유적 본질로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파리 코뮨도 러시아 소비에트도 생산적 노동의 조직화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인류의 공통성을 노동에서 찾는 한, 그 관점은 착취를 위해 삶을 노동으로 환원하는 데에 사활을 거는 자본의 축적욕과 대립하지 않는다. 삶을 조직하는 유일한 방식으로 노동을 제기하는 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는 종결되지 않을 것이다.

한편, 1968년 이후 노동이 자본에 실질적으로 포섭되는 국면은 현대의 노동을 전 지구적 차원에 걸쳐서 비인간적인 통제 기구를 창출하게 된다. 이제 노동자는 더 이상 8시간만 임금 노예인 것은 아니다. 그는 이제 25시간 끊임없이 자본을 위해 생산하고 또 소비한다. 그 과정 속에서 자본은 사회적 협력을 발전시키면서, 또 집단적 노동능력을 통합하면서 더욱 사회화된다. 그 결과 자본은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공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노동과 삶이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968년 이후 투쟁의 과정들은 개인적․집단적 착취라는 문제 전체를 전면에 부각시키면서 종래의 전체주의적 목표들을 일상적 존재의 미시적이고 분자적인 삶 전체의 차원들로 이전하게 했다. 이처럼 1968년의 본질적인 힘은, 착취에 대항한 인간적 반란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개인적 사슬들의 제거를 넘어선 삶 자체까지 확장되는 진정한 해방을 목표로 삼았다는데 있다. 즉, 인류의 공통성을 노동의 지평에서 끌어내려 자유롭고 다양한 인간의 활동성 자체에서 찾으려 한 점에 있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코뮨주의는, 오늘날 끊임없이 삶의 억압과 착취가 넘쳐 나도록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 더불어 인류를 절멸의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자본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노동 조직화의 포위망을 깨어 부수라는 호소일 뿐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삶 시간의 구성 요소로 기능하는 노동 시간에 대한 통제력의 환수이자 폐지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을 통해 해석된 맑스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듯이 코뮨주의는 계급 적대로부터, 노동과 노동조직화에 대한 거부로부터 직접적으로 태어난다. 이때 노동과 노동조직화가 자본주의적 형식인가 사회주의적 형식인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산업프롤레타리아트 시대에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통한 노동의 계획적 조직화라는 이행시기로, 코뮨주의는 국가의 사멸과 삶의 자율적 경영으로 특징지어졌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는 자본의 적대적 발전이 야기하는 파국을 계획적으로 통제하는 이행의 문제로 제기되었고, 코뮨주의는 이러한 끊임없는 이행을 통해 도달할 초월적인 유토피아(u-topia 장소 없음)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맑스가 <요강>에서 코뮨주의를 정의하는 방식은 자본주의 발전이 지닌 전반적이고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 주체성의 구성에 대한 상이한 결정성을 따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주체성의 구성에 대한 강조와 코뮨주의와의 연결성을 놓치지 않을 때, 오히려 코뮨주의는 이행의 과정에 다름 아니게 된다. 이럴 때 코뮨주의는 즉각적이고 내재적으로 구성되는 주체, 주체의 투쟁, 주체의 대체라는 문제임이 분명해진다.

코뮨은 다양한 주체들의 삶을 해방하는 것
그러나 산업(공장)프롤레타리아트의 중심성에 관한 담론들은 우리 시대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는데 불충분하다. 전통적 산업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이 더 이상 수적으로나 이상적 가치로서도, 심지어 생산된 경제적 가치로서도, 사회적 다수를 대표하지 않는다. 이들이 여전히 반란을 일으키고자 한다면 함께 투쟁해야 한다. 오늘날의 지구적 자본주의에서 오직 세계의 빈곤을 철저하게 경험하고, 하청노동, 비정규직노동, 중소․영세노동, 여성노동, 이주노동 등의 비보장노동의 형태들인 새로운 착취 형태들과 환경, 여성, 유색인, 동성애 등의 새로운 수난의 형태들을 확인하면서, 이 주위에 해방의 과정들을 조직하는 데에 성공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참여하는 데에 성공하는, 대의적인 방식으로 활동하지 않고 구성적으로 활동하는 프롤레타리아트로서 함께 투쟁해야 한다.

우리시대의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적 형식들을 조직화하는 각각의 운동들은, 불가역적인 분자적 혁명들을 폭발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삶을 토대로, 다양성을 향해, 새로운 연합과 아래로부터의 전지구적 전유 운동(지구화의 역전운동)이 주체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혁명의 주체는 노동에서 삶으로 전진 배치되었다. ꡒ노동이 삶을 자유롭게 하리라?ꡓ 이제는 아니다. 오히려 ꡒ삶이 노동을 자유롭게 하리라!ꡓ 코뮨주의는 주체들이 삶을 해방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