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호 [학술기획] 국가를 어떻게 문제화 할 것인가 -② 아나키즘, 권력을 저주한다
2003-04-05 09:33 | VIEW : 8
 
161호 [학술기획] 국가를 어떻게 문제화 할 것인가 -② 아나키즘, 권력을 저주한다

하승우/경희대 정치학 박사과정, '모색'편집위원

"당신이 동의하지 않은 권력에 복종하지 말라"


"인간은 들판의 꽃처럼, 하늘의 새처럼 거침없이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무정부주의라는 낙인 속에 왜곡과 편견으로만 읽혔던 아니키즘. 국가권력을 향한 그 가장 오래된 도전장을 들춰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글싣는 차례>
① 국가 포획을 너머 차이의 생성으로
② 아나키즘, 권력을 저주한다
③ 인간들의 자유로운 연합체, 코뮨    


아나키즘을 논의하기 전에 오해를 밝힐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지만 무정부주의가 아니다(‘무정부주의’라는 번역은 한국의 아나키즘이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던 일제의 것을 그대로 따왔다는 점에서 씁쓸함을 더해 준다). 아나키즘은 국가권력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분명 무정부주의이지만, 정부가 없는 상태를 무질서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정부주의가 아니다. 국가없는 상태는 파괴와 약탈, 혼란으로 가득찰 것이라는 생각(착각?)은 모든 매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주입되고 있다. 과연 국가가 없어지면 세상은 폭력과 파괴, 죽음으로 가득 찰까. 목을 죄어오는 숨가쁜 경쟁이 아니라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는 불가능한 것일까. 아나키즘은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다. 아나키즘은 악의 씨앗으로 국가권력을 지목한다. 근대 국가권력의 기초는 허구적인 자율성을 가진 개인이고, 개인은 그런 자율성마저도 계약을 통해 빼앗긴다. 아나키즘은 이런 사회계약론을 거부한다(누구도 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적이 없다). 고드윈(Godwin)은 정치가 인민의 동의로 이루어지더라도, 동의하지 않는 개인에게는 어떠한 권력도 가질 수 없다고 지적했다.

파괴에 대한 충동이 창조적 충동

계약과 대의제를 통해 빼앗긴 결정권을 되찾고 자신이 인정하지 않은 권력을 부정하는 것, 이것이 아나키즘이다. 자신에 대한 주인이 되기 위해, 자유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反강권주의자들은 누구나 아나키스트로 불릴 수 있다. 아나키즘은 허구적인 자율성을 벗어던지고 자아를 되찾으려는 노력이다. 사회가 개인들로 파편화되었다면 국가와 경제 영역에서는 권력과 자본의 집중화가 가속화된다. 개인은 파편화되고 왜소화되어 중앙화된 권력에 도전하려는 생각을 버린다. 장애물을 제거한 오만해진 국가권력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밖에 없다(사회주의 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아나키즘은 이런 국가권력에 가장 치열하게 저항한다. 흔히 아나키즘은 빈민층과 룸펜의 사상으로, 과격한 테러리즘으로 점철된 사상으로 비춰진다. 정확한 표현이다. 아나키즘이란 현 사회의 변화에서 아무 것도 잃어버릴 것이 없는 사람들이 국가권력을 타도하기 위해 힘을 뭉친 것이다(영화 <아나키스트>에 나오는 멋진(?) 낭만성이 실제 아나키스트에게는 없다). 그리고 근대국가는 상비군과 관료제라는 절대적인 폭력기구를 독점하고 있다. 이런 국가권력과 맞서 싸우는데 폭력을 쓰지 말라고 하는 것은 차, 포를 떼고 장기를 두라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물론 무차별적이고 무동기적인 테러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아나키즘의 성격은 당시의 사회주의운동과 차별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아나키즘은 부르주아의 정치적 권력을 프롤레타리아의 정치권력으로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들의 비판은 국가로 제한되지 않는다. 아나키스트들은 혁명적 임시정부, 권력장악을 위한 조직 등을 신뢰하지 않았고 그것을 속임수로 보았다. 권력의 즉각적인 해체, 이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아나키스트들의 혁명은 조직된 힘에, 프롤레타리아의 조직된 힘에 기반하지 않았다. 혁명의 청사진은 없다. 바쿠닌(Bakunin)이 주장하듯 혁명은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의 힘이나 예정된 역사법칙이 아니라 억압받는 대중의 본능에 기반한 것이고 그렇기에 자연발생적인 것이다. 개인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인간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자유를 향한 충동, 평등을 향한 열정, 반란을 위한 신성한 본능이 혁명을 불러온다. 바쿠닌의 이런 생각은 “파괴에 대한 충동이 창조적인 충동이다”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바쿠닌은 근대의 산업과 기술이 이런 대중의 반란적인 본능을 길들인다고 봤다).

독립적인 자율성을 가진 공동체의 연맹

국가가 없는 상태는 홉스(Hobbes)의 얘기처럼, 모두가 모두를 죽일 수 있는 상태, 폭력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로 가득차 있을까. 아나키즘에 따르면, 이런 생각은 지배계급이 길들여 놓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압제에서 해방된 대중은 자유와 연대성에 기초해서 합리적 질서를 스스로 창출한다. 이 사회에서는 내가 동의했고 그 동의를 언제나 철회할 수 있는 권위만이 인정된다. 즉 아나키즘은 지도자를 제도화하는 공동체적 배열이 아니라 그 지도자를 언제라도 몰아낼 수 있는 본능적 배열을 갖추고 있다. 아나키즘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고 그 신뢰는 합리성보다는 인간 내부에 잠재된 본능에 기반하고 있다(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아나키즘의 개인관은 자유주의와 다르다. 아나키즘에서 개인은 독특함을 가진 사회적 존재이다. 개인은 다르기 때문에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고 사회적 권리를 가진다(개인의 차이는 공동체를 유지시키고 발전시키는 근원이다).

아나키즘에서 공동체와 개인은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다. 푸리에(Fourier)가 구상하고 고댕(Godin)이 실현시킨 팔랑스테르는 공간 속에서 이런 생각을 실현시켜 주고 있다. 이런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아나키즘의 사유는 독립적인 자율성의 가진 각 공동체의 연대, 연맹이라는 틀로 확대된다. 아나키즘의 사유는 정치적인 면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그 특징을 나타낸다. 아나키스트들은 대규모 산업의 발달을 사회적인 악으로 봤기 때문에 프루동(Proudhon)은 인민은행을 통한 경제, 바쿠닌은 집산주의와 미르(mir)를 통해, 크로포트킨(Kropotkin)은 꼼뮨을 통해 미래사회를 내다봤다.개인이 생산하는 것은 그 개인만의 것인가.

크로포트킨은 부의 생산에서 개인의 역할을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즉 생산에 필요한 자원은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것이고, 같이 호흡하는 공기, 물, 작업장에서의 동료의 손길, 이 모든 것이 생산을 구성한다. 따라서 개인작업의 성과를 측정하는 임금체계(임금체계는 그것을 관리하기 위한 권력형태를 필연적으로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폐지되어야 한다. 크로포트킨에서 분배원리는 능력에서 필요로 전환된다. 크로포트킨은 ‘능력에 맞는 노동,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낯익은 원리를 제시한다. 아나키즘은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가정을 거부하기 때문에 개인이 필요 이상을 요구하지 않고 그 필요를 스스로 지배한다는 반대가정을 가진다(둘 다 가정일 뿐이다!).

생산도구가 모든 이를 위해 사용될 때, 노동자가 임금노예제에서 해방되고 유쾌한 환경에서 자신들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 때, 무기와 사치품의 생산이 사회적으로 유용한 작업을 위해 폐지될 때 모든 이의 필요는 충족될 것이다. 그리고 억압과 지배에서 해방된 인간은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상호부조의 본능을 기억해 낼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정은 대규모 생산 공동체가 아니라 소규모 생산공동체로 쪼개짐으로써 더욱 힘을 받는다. 크로포트킨의 이상은 지역적으로 자급자족하는(regional self-sufficiency) 체계이고, 작은 단위로 분산된 산업생산과 도시와 시골의 삶의 이점을 결합시킨 탈중심화된 사회인 “전원도시(garden city)”이다(이미 생태학적 투쟁의 구상이 등장한다).

무엇인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가. 대중을 얘기하지만 진정 대중의 삶을 이해하고 신뢰하는가. 아나키즘은 지식인의 방관자적 시각을 용납하지 않는다(보봐르(Beauvoir)의 ‘타인의 피’는 그런 시각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면서 아나키즘은 단호하게 얘기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있을 때의 유용함보다 없는 것이 낫다. 당신이 동의하지 않은 권력에 복종하지 말라! 아나키즘의 시작이자 그 목적이다.맥락읽기 직접행동과 사회혁명아나키즘에서 모든 권력을 반대하는데 기본적인 원리로 작용하는 것은 ‘직접행동론’이다. 이것은 타인의 개입이 없는 직접적인 자기의 실현을 일컫는 말이다. 자신이 파악한 현실을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 나가는 것이다. 모든 권력에 반대하는 것, 이것은 곧 어떠한 권력기구에도 자신을 위임하지 않는 것이다. 직접행동론은 자주·자립정신으로 추상화될 수 있다.현실적으로 직접행동론은 오늘날 대의제를 원칙으로 하는 민주제도라 일컬어지는 ‘의회주의’에 반대한다. 또한 다수결원칙을 철저히 부정한다. 제기된 문제의 진리 여부를 결정하는데 사람의 수로 결론을 내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불합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에게 정당조직은 허용되지 않는다. 선거에 입후보하거나 투표하는 것은 그들이 저주하는 권력을 배양하는 행위인 것이다. 직접행동론의 ‘자율’ 정신은 의회주의를 부정하며 이것은 ‘정치혁명’의 부정을 내포한다.

모든 권력에 반대하고 자기의 직접실현을 꾀하는 아나키즘은 낡은 권력에서 새로운 권력을 수립하는 것으로 혁명을 정의하지 않는다. 바쿠닌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에게 혁명은 곧 ‘사회혁명’이다. 정치혁명을 부정한 사회혁명이란 무엇인가. 사회혁명의 기본은 ‘경제혁명’이다. 경제가 사회화됨으로써 국유화로 인한 일체의 비자주성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분히 개량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프루동에 비해 바쿠닌의 ‘사회혁명’은 행동적이며 급진적이다. 바쿠닌에게 혁명은 ‘전쟁’, 즉 파괴인 것이다. 파괴는 새로운 것의 창조를 전제한다. 사회혁명의 파괴는 제도와 사회적 지위에 대한 것이며 불가항력적인 경우를 제외한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그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계급과 계층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자연 및 사회 환경의 타의적 산물이며 인간 그 자체가 ‘죄’는 아니기 때문이다. 직접행동론과 사회혁명은 개인의 ‘자율성’의 실현이다. 이것은 아나키즘의 혁명적 자발성,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오래된 격언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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