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호 [고전과 지금] 니체 최상의 삶은
2003-04-05 09:37 | VIEW : 6
 
161호 [고전과 지금] 니체 최상의 삶은
스스로를 치유하는 것

전예완 / 서울대 미학석사
  


신(神)의 도덕을 거역한 탕아에서부터 나치즘의 사상적 근거까지, 오랜 세월 갖가지 소문과 평설에 휩싸였던 니체. 이제는 근대 철학 해체의 선구자라는 타이틀이 그를 사로잡고 있다. ‘나는 나를 증거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사람들은 나를 듣지 않았고 보지조차 않았다(…) 나를 들으라! 나를 그 누구와도 혼동하지 말라!’(『이 사람을 보라』)는 니체의 절규는, 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자신의 사상이 읽혀지고 파악되기를 바랐다기보다, 자신과 같은 지평에서 ‘체험되기를’ 원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권력의지, 영원회귀, 차이, 다양성, 능동, 긍정의 철학 등 니체를 따라 다니는 많은 개념어들, 니체 철학의 본연을 일러준다는 많은 주석서들을 일단 제쳐두고 먼저 그가 말하는 것을 듣자.

그의 철학이 문학적 수사들로 포장되어 있기에, 길잡이가 없으면 오해하기 쉽다고? 그 반대다. 니체의 사상이 이러저러한 식으로 이미 ‘이해’되었다는 오해, 그것이 당신과 니체 사이를 갈라놓는다. 당신은 그의 ‘장광설’ 속에서 ‘핵심 사상’을 뽑아내려 들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말한다. “나는 피(血)로 쓰여진 것들만을 사랑한다. 낯선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책읽는 게으름뱅이들을 증오한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따라서 그의 말마따나 “‘철학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를 직접 만나는 것이 니체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길, 가장 빠르진 않더라도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될 것이다.

철학은 영원한 진리, ‘이 삶’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보편적인 어떤 것을 추구하며 그것에 근거하여 이 세계와 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삶과 무관한 ‘진리’란 없다. 진리, 실재, 신이며 따라서 이 삶의 원인이요 근거라 불렸던 것은, 오히려 삶이 삶 자신을 위해 만들어낸 피조물이다. 원인과 결과가, 창조자와 피조물이 전도된 것이다. 전도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까지도 삶이 스스로를 위해 프로그램한 것이다. 한때 인간은 삶을 강화하고 상승시키기 위해 그런 방식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에게 부과된 ‘진리’와 ‘도덕’은 삶을 상승시키기는커녕 깊이 병들게 하고 있다. 애초에 삶을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 삶을 소외시키고 있다면, 이제 그것은 없어져야 마땅하고, 그러기 위해선 그 전모가 드러나야 한다. 즉 그것이 ‘영원불변의 존재’가 아닌, 우리가 ‘만들어낸’ 것임이 밝혀져야 하는 것이다. “신은 죽었다”는 외침이 바로 그 폭로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이 죽고 나면, 즉 신이 애초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결과는 어떠한가. 이는 자신이 디디고 있던 지반이 꺼지고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끔찍한 경험이다. 이 세계는 해답 없는 수수께끼들의 혼돈으로 바뀌어버린다. 이 나락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도무지 ‘살’ 수 없게 된다. 신의 죽음을 저주로 느끼는 것에서 축복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그 험난한 극복 과정의 기록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신의 죽음이라는 일종의 극약 처방을 받고, 그것을 견뎌내어 건강을 회복하는 자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치유하는 자를 직접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도움”이라고 니체는 말했다. 니체 사상의 커다란 목표가 삶을 회복하는 것일진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그 중심이다. 이 책이 보여주는 기쁨의 어조를 기억한다면, 니체가 자신의 시대의 철학, 종교, 도덕, 역사 등에 대해 집요하게 퍼붓는 온갖 심한 독설들을 견디기 수월할 것이다.니체는 자신의 사상이 건강한 삶을 회복하는 처방임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누구에게나 잘 듣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누누이 주지시키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강조한다. “나의 사상은 만인의 사상이 아니다. 나는 만인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동류(同類)들’에게 말한다.” 자신에게 니체가 쓸모있는 약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이 판단할 문제이다. 그러나 그 전에 니체를 만나 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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