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호 [학술기획] 국가를 어떻게 문제화 할 것인가 -③ 자유로운 연합체, 코뮨
2003-04-05 09:38 | VIEW : 5
 
162호 [학술기획] 국가를 어떻게 문제화 할 것인가 -③  인간들의 자유로운 연합체, 코뮨
노동자 권력과 자유인의 연합체 사이의 긴장

정성훈 / 서울대 철학과 박사과정


소련을 '전인민의 국가'로, 계급투쟁의 종결로 선포한 스탈린식 사회주의는 맑스-레닌의 국가 소멸론과는 명백한 단절이었다.  "현실사회주의 붕괴이후, 맑스를 경전처럼 여기던 풍토는 버림받아 마땅한 근대의 유물로 치부되거나 혹은 변형되고 전복된 유령으로 남아있다. 맑스-레닌주의는 국가주의라는 낙인으로 그 죄값을 치르고 있다. 그러나 이제 진지하게 다시 묻고자 한다. 자보눚의 국가체제를 넘는 그 과정에 대한 결정론적 사고는 맑스나 레닌이 아닌, 바로 우리 안에 있지는 않았는가. <편집자주>

<글싣는 차례>
① 국가 포획을 너머 차이의 생성으로
② 아나키즘, 권력을 저주한다          
③ 인간들의 자유로운 연합체, 코뮨    


  20세기 사회주의 국가들이 강력한 관료 국가로 존재했다는 사실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의 이미지 때문에 맑스주의를 국가주의의 한 종류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맑스가 자신의 사회적 이상을 표현한 말은 『공산당 선언』에서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였고, 『자본』에서는 ‘자유인의 연합체’였다. 『공산당 선언』의 문구는 잘못 읽으면 공동체에 대한 강조로만 읽혀 이상적 국가에 대한 칭송으로 착각하게 되는데 『독일 이데올로기』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고려한다면 국가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가 창출하는 현실은 바로 개인들로부터 독립된 어떤 현실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현실적 토대다.”

즉 자유인의 연합체는 개인 우선의 공동체, 개인이 거부권을 가지고 자유롭게 선택하는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이는 결코 개인의 동의와는 무관하게 귀속을 강제하고 의무를 부과하는 국가일 수는 없다. 자유롭게 연대하는 무수한 공동체들의 네트워크만이 이런 사회적 이상에 걸맞은 것이다.따라서 지난 연재에서 아나키즘을 대변하는 하승우의 슬로건인 “당신이 동의하지 않은 권력에 복종하지 말라!”는 맑스의 사회적 이상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또한 크로포트킨이 제시한 ‘능력에 맞는 노동,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원리는 <고타강령 초안 비판>에서 맑스 또한 제시했던 원리다. 고병권이 주장하는 “더 나은 통치형태가 아닌 더 나은 자유형태”의 추구도 맑스의 사회적 이상과 다르지 않다.

국가소멸을 목표로 하는 과도권력에 대한 재구성

맑스주의가 아나키즘이나 차이의 정치론자들과 달라지는 지점은 그런 사회적 이상을 실현해나가는 과정에 있다. 아나키즘이 권력을 소멸시키기 위한 권력에 반대하고, 차이의 정치론자들이 이행 전략이라는 것 자체를 고민하지 않는데 반해, 맑스주의는 맑스가 그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레닌이 정식화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과도 권력, 국가 소멸을 목표로 하는 국가를 설정한다.맑스-레닌주의(국가이론을 포함한 레닌의 이론이 맑스주의의 계승-발전이라고 생각하며, 소련에서부터 체계화된 20세기 사회주의 사상을 19세기 맑스-엥겔스의 사상과 구분지어 지칭할 때 ‘맑스-레닌주의’라 부르겠다.)의 입장에서 볼 때, 아나키즘은 개인들간의 경쟁과 적대를 기반으로 그들 위에 군림하는 자본주의 국가를 결코 극복할 수 없다. 조직된 권력이 없이는 결코 상비군과 관료체계를 통해 보장되는 사적 소유의 질서를 전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대중을 파편화시키고 경쟁으로 내모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의 본능과 자연발생성이 언젠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무구한 주장이다. 20세기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기 전까지 맑스-레닌주의자들은 아나키즘을 이렇게 조롱하면서 자신들의 과학성과 현실성을 자랑했다. 그들은 ‘자유인의 연합체’라는 사회적 이상의 의미도 따져보지도 않고 개인주의를 비판했고 집단주의 사회인 사회주의 국가를 찬양했다. 변증법에 도취되어 국가가 국가를 소멸시킨다는 모순이 생산력 발전 속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낙관했다.나는 맑스-레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나키즘이 자본주의 국가를 극복할 수 없는 순진무구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집권 내지 권력에의 개입을 목표로 하는 정당 운동을 배제한 채 비국가적 영역에 한정된 자치운동과 시민운동을 추구하는 것은 아무리 순수한 선의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 국가의 힘에 순응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시작해 자유인의 연합체로 나아가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 또는 노동자 권력을 수립하는 집권의 노력을 배제해선 안 된다. 문제는 어떻게 노동자 권력과 자유인의 연합체 사이의 긴장을 극복할 수 있는가에 있다.문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자유인의 연합체, 또는 국가가 존립하는 사회주의 단계와 국가가 소멸한 공산주의 단계라는 두 가지 상태를 중심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사고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상태에서 비국가 상태로의 이행이라는 사회체계적 변화를 형식적으로 설정하는 것만으로는 국가가 국가를 소멸시킨다는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 공산주의 운동의 사회적 행위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만 새로운 권력의 형성과 권력의 소멸을 동시에 사고할 수 있다. 두 가지 상태는 비동시적이기에 앞선 상태(국가)의 관성을 지속시키게 되어 뒤따라야 할 상태(비국가)의 출현에 장애가 되지만, 두 가지 행위는 동시에 가능하기 때문이다.나는 공산주의 운동의 사회적 행위를 두 측면으로 나누어 바라본다. 첫째는 낡은 권력을 타도하고 새로운 권력을 세우는 혁명적 실천이고, 둘째는 개인들로부터 독립된 어떤 현실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윤리적 실천이다. 혁명적 실천은 한 국가의 차원에서 집권하기 위한 노력이기 때문에 운동 자체의 권력지향성을 강화시킨다.

  봉기를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제각각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집권을 준비하는 정당 운동은 최대한 단일화되어야하며,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다수결의 민주주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윤리적 실천이란 혁명적 실천의 과정에서 공산주의 교류형태를 확산하는 것이다. 여기서 ‘교류형태(Verkehrsform)’는 ‘생산양식’, ‘사회구성체’ 등과는 달리 공산주의를 행위 중심으로 바라보게 하는 개념이다. 청년 맑스가 ‘생산관계’라는 개념을 도입하기 이전에 썼던 것인데, 사물을 주고받는 형태를 포함한 사람과 사람의 모든 상호 작용 형태로 해석할 수 있다.자본주의 사회는 화폐를 매개로 하는 교환과 생산수단의 소유권, 행정체계, 화폐 관리 등을 매개로 하는 신분적 지배를 주된 교류형태로 확산시킨다.

노동자 정당과 노동자 권력은 개인에 대한 강제력을 갖는 것이기에 관료적 지배라는 일종의 신분적 지배를 배제하지 못한다. 또한 분배 원리에 있어 교환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사회체계도 필요에 따라 주고받으며 차이에 따라 자기 가치를 실현하는 교류를 근원적으로 막지는 못한다. 따라서 공산주의 교류형태의 확산, 자유인의 연합체를 위한 윤리적 실천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며, 새로운 권력을 세우는 혁명적 실천과 함께 진행될 수 있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공산주의를 현실이 이에 의거해 배열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나가는 운동”임을 강조한 맑스의 언급도 이 점을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유인의 연합체라는 사회적 이상은 어느날 완성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현재의 윤리적 실천을 그야말로 이상화한 것이다.

혁명적 실천과 윤리적 실천의 동시적 사고 필요

국가권력의 형성은 단지 특정한 사회체계의 폐해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자기 보존을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 더 나은 자기 보존의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다른 인간을 지배하려는 경향 속에서 생긴다. 따라서 모든 권력이 해소되는 상태는 꿈일 뿐이다. 혁명적 실천과 윤리적 실천의 병행만이 아나키즘의 순진무구함을 극복할 수 있다. 또한 두 가지 실천의 병행은 공산주의 운동이 국가주의로 타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국가의 폐지-건설 과정과 소멸의 과정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두 가지 실천의 병행은 한국의 진보정당 운동에서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집권은 커녕 의회 진출조차 못 이룬 상황에서 윤리적 실천은 방기되기 쉽다. 하지만 혁명적 실천과 윤리적 실천은 모순이 아니라 긴장 관계에 있을 뿐이다. 그 긴장의 어려움으로 인해 자본주의 국가를 극복하려는 집단적 노력을 포기하는 것은 자기만족적 운동이며, 혁명 이전에 공산주의 교류형태의 확산을 포기하는 것은 20세기의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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