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호 [고전과 지금] 마르셀 푸르스트 삶을 재구성하는 기억의 미학
2003-04-05 09:47 | VIEW : 6
 
163호 [고전과 지금] 마르셀 푸르스트 삶을 재구성하는 기억의 미학

남수인 / 상명대 불어교육과 교수
  


오늘날 프루스트의 영향력은 문화와 사회전반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에서 여주인공의 그림이 책갈피되어 있는 책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기억의 문제는 영화, 연국, 음악, 전반에 걸친 현대의 화두이자 정체성 찾기와 관련 맺는다.       프루스트는 유일한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로 기억되고 있다. 이 작품은 『스완네 쪽으로』, 『활짝 핀 소녀들 그늘에서』, 『게르망트갱, 『소돔과 고모라』, 『갇힌 여자』, 『떠나간 알베르틴』, 『되찾은 시간』으로 구성된다. 3천여 쪽의 대하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작품을 두어 마디로 줄거리를 말하고 압축하고 단순화함은 무자비한 훼손행위가 될 수밖엔 없을 터이나, 우리가 쓸 수 있는 글자 수가 정해진 상황에서 달리 어떻게 하랴. 내용은 제목이 시사하듯 화자가 살아온 삶을 되살리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 즉 과거를 재구성하고 ‘재현’한다. 작가가 되려는 어린시절의 소망을 접고, 상실과 환멸, 불면과 병으로 허약해진 신체, 추레해진 마음으로 옛친구의 초대를 받아 다시 찾은, 행복한 소년시절의 추억이 깃든 콩브레-탕송빌르는 ‘의구’하나, 친구들은 예전 같지 않다. 전 베르뒤랭 부인이 신화적 왕족인 게르망트 가문의 프린세스로 변신하여 개최한 파티에서 만난 지인들은 가면을 쓴 듯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시간의 장난이다. 그러나 같은 기회에 무의지적 기억이 마법처럼 현재의 시간 위에 과거의 한자락을 접속시켜 떠올림을 경험하며, 파괴자 시간을 제압할 수단을 발견한다. 그것은 창작이다. 잃은 시간을 소설이라는 틀 속에 기억과 지성을 얼개로 하여 되찾아 형상화하는 것이다. 이제 화자는 자신의 인생을, 보다 구체적으로 형성중인 “나”, 행동하는 “나”를 동반하고 관조하는 시선이요, 글로 쓰는 의식이다. 프루스트의 작품은 20세기의 사상과 자연과학의 화두였으며 새로 시작된 세기에도 여전히 연구가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시간, 그리고 인간의 정신-의식, 기억, 지각을 그 테마로 하고 있다. 소설의 독자들만이 아니라 지성인들, 학자들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한 주제인 것이다.

이 책은 제 1권이 출판된 당시 벌써 기성 작가들로부터 주목을 받았고, 작품 전체가 완간된 30년경부터는 일반 독자들, 비평가들, 문학이론가들, 젊은 작가들로부터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관심의 폭은 갈수록 심층적인 연구로 확대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프루스트의 작품은 고전이라고 하기보다는 현재적 작품이라고 불러야 할 듯 싶다. 50년대 이전까지 작품은 작중인물과 실존인물과의 관계, 작가와 작품과의 관계(자서전이다, 아니다) 등, 전통적 방식으로 읽힌 듯하다. 구조주의 비평과 함께, 읽기는 주제주의 방식( 리샤르), 서사학적 방식(쥬네트, 타디에), 정신분석적 방향(풀레, 크리스테바), 철학적인 관점(들뢰즈, 라트르), 문체 연구(미이), 사회학적인 방향(벨로이)으로 다변화된다.

이제 프루스트는 타 작가들에 대한 연구에서도 거의 언제나 인용되고 있다. 말하자면 어떤 참조대상, 레퍼런스가 된 것이다. 프루스트가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을 모방하면서 글쓰기 자습을 했듯이 프루스트의 후대 작가들은 모두가 프루스트를 읽었고 많건 적건 그에게 진 빚을 고백한다. 누보 로망의 소설가 나탈리 사로트는 어느 대담에서 프루스트가 없었으면 자신의 『의혹의 시절』은 존재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보다 몇 년 후 내놓은 『황금 과일』 역시 작품에 대한 다양한 독자들의 반응, 내면의 목소리들을 은유와 이미지를 통해 반향시키는 점에서 프루스트를 연상시키는데, 그 책에서 작가는 문학계는 ‘황금과일’ 이후와 이전의 세대로 갈린다고, 자기네는 이후에 위치한다고 말한다. 이 황금 과일, 이 역사의 한 획, 그것은 곧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지적 즐거움으로 프루스트 읽기

프랑스 문학사에서 졸라로 대변되는 자연주의 소설이 끝나고 소설의 위기가 회자되는 시점에서 등장한 프루스트의 소설은 테마의 심오함만이 아니라 인내심을 요구하는 외형적인 방대함으로 독서 열의를 꺾어 놓는다. 결코 흥미진진하여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그러한 책은 아니다. 프루스트는 감상적, 감각적 즐거움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서 우리는 명철한 시선으로 남과 나를 들여다보는 지적인 즐거움을,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추어보며 느끼는 인간과 사물에 대한 동정을 맛본다. 사물을 보고 느끼고 표현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출신지와 출신 고, 출신 대학을 알면 더 이상 상대에 대해 알 것이 없고, 상대에 대해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는, 황당할 만큼 짧은 사고방식을 퇴치해야 함을 인식한다. 천재가 명문 출신도 아니고 소심하고 깐깐한 평범한 시골 아저씨의 외관 아래 숨어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은 복합적이어서 천재이지만 바보일 수 있고, 성실과 따뜻한 마음과 함께 냉정함 또는 변태적인 취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진실을 찾기란 어렵다는 것을, 말에 가려 말속의 진실을 간파하는 것이 지난함을 알 수 있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망각과 함께 우리 속에서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은 죽고 그와 동시에 사랑의 주체인 나 역시 죽는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끝없이 죽는다. 진실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소년시절의 독서, 찬란한 태양과, 열린 창문에 일렁이는 반사된 바다…. 행복은 지각과 의식 속에 있다. 고통이 그렇듯.소설의 연구가는 소설을 사전과 함께 참고서들을 참고해가며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여 듣고 분석하고 해석해야 한다. 하지만 교양을 위해서 읽을 때라면, 지겨운 부분을 건너뛴들, 여기 조금 저기 조금이면 어떠랴. 단편적인 프루스트 독서에서도 독자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제안한 이는 폴 발레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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