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호 [테마서평] 영화와 철학의 만남
2003-04-05 09:48 | VIEW : 8
 
163호 [테마서평] 영화와 철학의 만남  
영화는 영화이다

이상용 / 영화평론가

『기술과 문명』(한길사 刊),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刊)


   “영화는 영화이다.” 이 말은 고전영화 이론가인 V. F. 퍼킨스의 저작명이다. 퍼킨스는 이 책을 통해 고전 영화 이론의 특징들을 규범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영화는 고전 이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이론의 지류 속으로 퍼져나갔다. 정신분석학, 기호학, 관객 이론 등 현기증 나는 이론의 전이 속에서 영화의 해석체는 다양한 철학의 옷을 입었다. 이론가들의 처지 역시 마찬가지여서 미국의 맑스주의자이자 듀크 대학의 영문학 교수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80년대 말 이후 영화이론가라고 불릴 정도로 후기자본주의의 최첨병에 관심을 쏟고 있다. 이렇듯 전공을 넘어선 관심사는 제임슨의 특기사항만은 아니다.

현대의 이론가들은 전공을 불문하고 영화를 자신의 영역 아래 포섭하려고 애써왔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대중들의 관심사와 밀접한 탓이 아닐까. 이론의 포교라고 할만큼, 영화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설파하고 대중화하는 것이 오늘날 보편적인 노력 중 하나다. 그것은 한국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최근 『기술과 운명』을 펴낸 이정우의 작업 이전에도 철학과 영화를 접목시킨 이들은 많다. 이진경, 김성환, 김영민, 조광제 등 한편의 영화와 조응한 이들의 철학은 때로는 흥미진진하면서도 쉽게 전달하는 안내자의 구실을 해왔다. 이러한 책이 꾸준한 명맥을 유지한 바탕에는 안내자의 몫이 제법 큰 탓일 게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이다.

이러한 책들이 양산한 폐해 가운데 하나가 영화를 무슨 철학독법의 교본으로 오인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다양한 해석의 지평에 익숙하지 않은 독서 문화와 시장 속에서 심각할 수가 있다. 영화보기나 시각문화에 대한 이해보다는 철학용어로 영화 텍스트를 도배하는데 익숙한 글쓰기들을 볼 때마다 그 심각성은 크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구나 이정우의 『기술과 운명』은 영화를 설명하는 단순함 때문에 철학의 도식에 끼워 맞춘 느낌을 준다. 구성을 보면 대부분 한 편의 영화를 소개하기 이전에 철학의 이론을 나열한 뒤 영화의 표면적인 내러티브 구조에 맞추어 풀어낸다. 내러티브 이외의 다양한 영화의 표현 영역과 심층 내러티브를 해석하는 행위에는 거의 무지하다.

물론 필자가 생각하기에도 이정우는 훌륭한 철학자이고, 성실한 번역자이다. 그러나 과거 대중 강연이나 몇몇 지면에 발표한 원고를 가다듬어 출간한 『기술과 운명』을 보면 성실한 철학자가 이토록 평범한 해석을 일관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탓이라고 할 수 있는데(조금 비약을 하면 이정우의 놀라운 들뢰즈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그가 행한 들뢰즈의 ‘영화’ 강연은 평범하기 그지없다.) 『기술과 운명』이 언론에 영화관련서적으로 공개됨으로써 발생할 영향력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이 책의 언론 서평은 하나같이 과장된 칭찬 일색이다.)반대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은 슬라예보 지젝이 편집한 히치콕을 통한 현대 영화 이론의 소개서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파스칼 보니체르와 미셀 시옹의 글이 여러 편 실려있고, 프레드릭 제임슨을 비롯하여 지젝과 교우하는 여러 이론가들의 글이 흥미를 끈다.

하지만 이 책은 완전히 소화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그것은 라캉 때문이 아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히치콕과 라캉을 경유하는 지젝의 작업이 『삐딱하게 보기』 등을 통해 소개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낯선 이론가라는 사실과 이번 책에 실린 글들의 대부분이 히치콕에 관한 유명한 글들을 재해석하거나 인용하는 메타 비평의 형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히치콕 읽기’와 같은 기본 논집들이 번역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의 세부적인 내용은 이해하기에 힘들다. 저작에서도 많은 언급되는 프랑스 영화 이론가 레이몽 벨루의 탁월한 히치콕 해석의 사전 독해 없이는 해독이 불가능한 대목도 눈에 띈다. 더욱 어려운 것은 이 책에 인용되는 히치콕의 영화 중 중요한 몇 작품은 국내에서 볼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이 테마비평은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는 기획의 일환이다. 국내에 소개된 영화나 출판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두 책이 보여주는 거리감은 현실의 자괴감을 반영하는 것이다. 국내에 출간하는 영화 책은 철학의 시녀 아니면 ‘시네마 레터’와 같은 연예편지 일색이고, 번역되는 외국서는 해석 대상인 영화를 접하기 어렵거나 기존의 이론서를 바탕으로 한 탓에 이중해독의 어려움이 있다. 문득 탁월한 영화 글쟁이이자 감독이었던 프랑소와 트뤼포의 말이 생각난다. 영화를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교본은 영화이다라고.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인 영상 아카이브 문화조차도 없다. 이론과 실천을 낳을 토대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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