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호 [상반기 학술정리] 대학원생들에게 권하는 책
2003-04-05 11:20 | VIEW : 9
 
172호 [상반기 학술정리] 대학원생들에게 권하는 책
바깥을 사유하거나 혹은 새롭게 표현하거나

권희철 / 즐거운 지식 <벌건눈> 회원

도대체 왜 이리 책들을 안읽는거야, 한심하게시리,

라고 말하는 건 어이없는 일이다. 책을 읽기 어려운 여건에 처한 사람들에게 아무리 책을 읽으라고 해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대학나왔다고 다 책 열심히 읽는 거 아니다. 대학교수도 안하는 짓을 회사원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세계의 문학>에 실린 회사원 강유원의 글. 인용문은 다분히 의도적인 배치다. 책 안읽는 대학원생들을 향해 몇 권을 자의적 기준으로 선택해 다시 자의적 해석으로 몇 글자 평하는 내 불량한 자세는 물론, 논문생산에 여념이 없어 그나마 해리포터도 읽기 힘든 대학원생들에게 어렵기 짝이 없는 책들을 소개하는 게, 그것도 짤막한 몇 가지 문장으로 일축하는 게 대책 없이 송구스럽기까지 하다. 아래 소개하는 책들은 반드시 읽어야할 그런 책이 아니라, 어떤 점에서만 유용하다는 걸 밝힌다. 학문적 가치가 아니라 공부에 대해 고민을 보다 쓸모 있게 해줄 그런 책들을 골랐다.

서양정신 자체이자 모체인 나르시즘

김상봉의 <나르시스의 꿈>에서 주인공은 거울이라는 사물이다. 김상봉은 서양의 철학, 아니 서양정신 일반을 나르시즘의 무대로 불러모은다. 나르시즘은 서양정신 자체이면서 서양정신의 무대다. 스스로 너무나 아름답다고 도취되어 있는 착란상태. 심지어 데리다 같은 해체주의자들조차 서양을 해체하기 위해 나르시즘의 무대로 돌아와야만 한다. 반면 한국정신은 나르시즘이 불가능한 것이냐. 김상봉은 그렇다고 말한다. 나르시즘에 빠져있는 한국정신이 있다면 그건 서구정신에 맹목적으로 동화된 것일 뿐이다. 한국의 이성은 맹목적 모방이었다. 한국 앞의 거울은 한국을 비춰주지 못한다. 김상봉은 이것이 슬프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서양정신을 극복한다는 것은 슬픔의 세계를 깊게 이해하는 일이다. 한용운과 함석헌, 박동환의 계보는 슬픔의 세계에서 건져 올린 보석과도 같단다. 서구의 홀로주체성은 나르시즘에 빠져 바깥을 보지 못한다. 서구 바깥의 정신은 슬픔에 빠져 바깥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절망과 역설의 논리학을 읽는 것은 쉽지 않으며 그것이 우리 생활의 슬픔으로 쉽게 연결되지 않는 탓에 서양철학자의 나른한 나르시스적인 꿈으로 읽을 공산이 크다.

강영안의 <우리에게 철학은 무엇인가>는 한국에서 서양철학이 어떻게 수용돼 왔는지 밝히고 있다. 김상봉의 논의를 실증적으로 조사한 자료집 정도로 읽으면 된다. 또 김재현의 <한국사회철학의 수용과 전개>와 비교해서 읽어도 흥미롭다. 강영안의 책을 읽으며 한국에서 학문을 한다는 게 얼마나 식민성의 왜곡과 착종에서 자유롭지 않은지 알 수 있게 된다. 특히 개념어들이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번역이 단순히 글자의 옮김으로 그치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에게 개념의 번역은 무비판적인 서구이론의 토착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영안 스스로 의도한 듯한 오류가 이 책을 읽는 결정적인 장애물로 다가온다. 이를테면 박종홍의 사유를 논하면서 박정희시대의 사회적 맥락을 설명하지 않으며 또 시대적 정황과 학문의 교착상태를 보여주지 않는다. 강영안에게는 그야말로 철학의 외부가 긴요하게 보인다. 이진경의 <철학의 외부>를 보자. 탈주의 철학으로 유명한 이진경이 그간 내놓은 조각글들을 묶어놓았다.

<한겨레>의 인터뷰는 탈주에서 외부로 이행한 사연을 물었는데, 기자가 농담으로 그런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탈주가 어디로부터의 탈주라면 외부는 그 어디의 바깥일뿐인 것을. 이진경 스스로는 자신의 사유여정을 맑스주의 외부의 탐색이라고 한다. 외부와 무관한 보편성의 사유형식, 그것은 필경 법적인 형식의 정치학을 포함하는 국가적 사유로 귀착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김상봉이 보기엔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일일지도 모른다. 또 사사방의 이진경과 탈주의 이진경의 이해할 수 없는 거리를 두고 학문적 변절을 논할 수도 있다. 다만 이진경으로 인해 한국의 탈근대 논의가 서구의 그것과는 판이한 양상을 띄게 됐다는 점은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 이진경은 맑스주의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라깡과 푸코, 들뢰즈를 수없이 등장시키지만 배우들은 한결같이 맑스의 가면을 쓰고 있다. 그의 영향력으로 인해, 한국의 탈근대 논의는 사변 수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적수들은 서양의 논의 그 자체를 정치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강단의 학자들이다. 강단의 눈에서 볼 때 이 책은 조악하고, 대중의 눈에서 볼 때는 일종의 문건이다.

강단 밖에서의 지식생산

최근 사망한 스티븐 제이 굴드의 <풀 하우스>와 리차드 르원틴의 <삼중 나선>은 한국적 과학의 맥락에 비춰볼 때 유익하다. <풀 하우스>는 진화론에 대한 오해를 지적한다. 진화는 단선적 진보가 아니며, 거꾸로 다양성의 증가라고 주장한다. <삼중 나선>은 DNA 결정론을 비판하며 환경이라고 하는 변수의 중요성을 말한다. 오늘날 과학보도는 일종의 미신과도 같다. 하나의 가설과 실험이 대중들에게는 근엄한 의사의 진단처럼 여겨진다. 또 확률에 의한 계산은 마치 부동의 값처럼 회자되기도 한다. 서구의 과학적 이성은 일종의 신으로 군림하게 됐다. 적어도 한국에서 서구의 과학적 이성은 보호와 재건의 대상이 아니라 해체의 대상이 아닌가. 지적 사기보다 더 나쁜 건 과학에 대한 맹목이기 때문이다.

이미 예고된 지는 오래지만 강단 바깥에서 지식이 생산되고 있음을 몇몇 책에서 거듭 확인하게 된다.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진중권의 <폭력과 상스러움>, 김용석의 <깊이와 넓이 4막 16장>, 이택광의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등이 그것. 이들의 책과 대비되는 게 <책세상문고>이다. 여기서는 젊은 학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나름대로 한국사회에 대한 예리한 진단을 내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책세상문고는 거의 저자들의 학위논문을 요약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논문이 아닌 경우도 논문글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문제의식은 살아있되 그 표현방식은 구태의연하다고나 할까. 반면 위 저자들의 책은 한결같이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구가하고 있다. 사회적 의제가 강단이 아닌 저널리즘에서 만들어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제는 표현의 영역까지 강단 바깥이 주도하고 있음을 본다. 적어도 그들은 대화가 가능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교수신문>의 학술에세이가 결과적으로 실패한 데에는 그 참여자들이 강단의 그늘, 논문글쓰기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데서 찾을 수도 있다. 사실 논문글쓰기냐 에세이냐가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건 새로운 주장을 위해선 그만큼의 새로운 표현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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