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호 [학술기획] 과학읽기 세상보기- ④ 현대과학과 동양사상의 대화
2003-05-28 03:20 | VIEW :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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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과학철학이 학계의 학제적 분위기를 반영하며 다양한 지평에서 깊이 있게 논의되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과학은 세상을 독해하는 준거의 하나였다. 과학으로 오늘 읽기, 동시에 오늘의 과학을 비판적으로 읽어내기가 이번 학술기획에서 의도하는 바이다.
<편집자주>

글 싣는 차례
① 현대 과학철학의 흐름과 주요 논쟁
②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사회학
③ 탈근대의 키워드, 반과학주의
④ 현대과학과 동양사상의 대화


80년대 이후 국내에 ‘신과학’ 관련 책들이 많이 소개돼 동양사상과 신과학을 연관지어 논의하는 것이 하나의 조류를 이뤘다. 신과학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이후 20세기의 새로운 과학적 발견들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컴퓨터의 발전으로 가속화된 20세기 후반의 과학적 성과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동양을 유교문화권의 범위로 좁혀서 논의해 보면 이 유교문화권 내부에서 과학기술의 문제는 나름대로의 전통과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맹자가 말한 삼달존(三達尊)은 유교 사회의 구조를 표현한 개념으로 볼 수 있는데, 군주를 정점으로 한 관료조직과 백성, 그리고 이와는 다른 집단으로 지식인 집단을 설정했다. 물론 지식인 집단은 주로 관료로 진출하거나 관료 조직의 재생산 구조에 종사하는 사회적 역할을 한다. 이 사회의 구조는 임금-백관-백성의 위계 구조를 갖는다.

그런데 <고공기(考工記)>의 기록을 고려하면 백관과 함께 백공(百工)의 자리를 설정할 수 있다. 관료집단 안에 기술자 집단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중국과학사가 가와하라(川原秀宬, 도쿄대 교수)는 중국의 역대 서적 출판 통계를 분석하여 유교 경전의 출판과 과학기술 서적의 출판이 정비례 관계를 가지며, 유교 경전 출판과 잡술 관련 서적의 출판은 반비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밝힌 적이 있다.

유교의 통치론이 인간 관리, 즉 인치(人治)에 중점을 두었다고 하더라도 실제 정치의 문제는 과학기술과 떼 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자연학과 인간학은 어느 하나를 버릴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 사례다. 다만 유교사회의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제도에 따라 자연학이나 기술학보다 인간학을 우위에 두었기 때문에 유교와 과학은 상승작용을 할 수 없는 관계로 오해할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

유교문화권 과학기술의 전통과 흐름

17세기 이후 예수회 선교사를 통하여 전해진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한 유교 지식인들의 관심도 거론할 필요가 있다. 한 세기 반에 걸친 예수회 선교사의 활동은 4백여 종의 한문으로 쓴 서양 종교와 학문에 관한 번역서로 남았는데, 이 가운데 4분의 1은 선교를 위한 종교 서적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나 유크리트 기하학의 번역 같은 것이 그것이다. 청나라 황제를 비롯하여 당시 지식인들이 종교 교리보다는 과학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요구하였기에 이루어진 저술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한 유교 지식인의 대응에는 최근의 동양사상과 현대과학 논의에 시사하는 사례가 들어 있다.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은 서양 천문학의 방법으로 일식 월식을 예보하고 동시에 동양 전통의 방식을 따르는 구조로 천문대 이용을 이원화하여 문제가 되었다. 서양의 방식으로 예보한 것이 더 적중했기 때문에 전통적 방식을 쓰던 천문대 담당자들은 위기감을 느꼈고 이에 대응해 정치적 모략으로 선교사들을 압박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선교사들이 새롭게 소개하는 과학이 사실은 중국에 이미 그 뿌리가 있었다는 서양과학 중국원류설이 나오게 된다. 이 때에 자주 등장하는 책이 <주역>이었다. 이 시기 해박한 학자 방이지(方以智)는 서양의 학문은 질측(質測)에 장점이 있다고 인정했는데 이것은 경험 과학의 우월성을 지적한 말이다. 그러면서도 당시 과학이 신학적 세계관 아래서 소개됐기 때문에 통기(通幾) 즉 철학적 영역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방이지는 결론적으로 경험 과학은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여 은연중에 서양과학의 이론적 전제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한 셈이다.

이러한 대응은 조선 후기 기철학자 최한기(崔漢綺)에게서 더 이론적인 형태를 띠면서 나타난다. 최한기는 당시 선교사들의 저술 때문에 생긴 4원소설과 동양 전통의 오행사상 사이의 논쟁, 곧 사행오행 논쟁에 대하여 오행사상은 출발부터 우주의 물질적 기초에 대한 논의가 아니었으며, 4원소설도 최한기 당시 50여종의 원소가 발견된 사실을 들어서 비판했다. 그러면서 세계의 근원을 기(氣)로 설명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최한기는 기의 속성을 활동운화(活動運化) 네 글자로 설명하였는데, 이것을 기의 생명성[生氣], 운동성[常動], 순환성[周運], 변화성[大化]의 표현이라고 바꾸어 볼 수 있다. 최한기는 기의 생명성을 명확히 개념화함으로써 선교사들의 저술에서 보이는 창조설이나 우주에 대한 기계적 관점을 반대하려는 의도를 표현했다.

현대과학과 동양사상 논의 구도, 재검토 필요

현대과학의 비평형 열역학에서 그리는 우주 진화에 대한 자기조직론을 최한기의 기철학에서 활동운화하는 기의 이론과 대비시키면 많은 유사성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과학과 동양사상에 대한 최근 논의 구도의 몇 가지 전제를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신과학운동에서 말하는 동양사상이나 현대과학은 카프라를 비롯하여 신과학운동론자들의 사회·정치적 주장에 설득력을 싣기 위한 들러리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최한기 이후 우리 역사는 개화와 근대화의 길을 걸었다. 우리의 생활과 생각의 많은 부분은 서구적인 것이 됐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사상은 근대화 이전의 전통사상을 가리킬 수 있지만 현대과학을 이해하는데 굳이 과거의 전통사상을 끌고 올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우리가 해결하려는 문제에 필요한 정보는 전통이든 동양사상이든 제한을 둘 이유가 없을 것이다.

철학사나 사상 체계의 힘이라면 나름대로 역사적 경험의 반영이고 집적이기 때문에 현대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유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기철학자 최한기의 주제 가운데 하나는 유교 정치론 윤리론과 과학기술을 어떻게 종합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전통 철학의 심신 일원론과 종합적 관점을 중심에 두면서 의미 있는 인식론의 체계를 세웠다. 이 체계는 현대의 인지과학이나 인식 생리학의 영역과 연관되지만 최한기의 아이디어가 아주 세련되지는 않더라도 현대의 과학 문제를 다루는데 어떤 영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생각은 현대과학이나 동양사상을 고정된 불변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어떤 형태로 정식화하려는 발상과 다르다. 현대과학은 계속 탐구해 가는 과정에 있고 동양사상도 우리가 한정하고 싶은 대로 한정되지 않는 대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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