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호 [사회기획] 진단, 복수의 사회 ② 가족의 복수
2005-04-23 05:33 | VIEW : 41
 




진단, 복수의 사회 : ② 가족의 복수





공장굴뚝 연기에 상처입은 자연이 시시각각 인간을 공격한다고 난리다. 자연의 복수다. 익숙한 이야기라고? 인간을 한낱 기계부품 쯤으로 생각해 온 사회적 선택에 상처입은 개인들의 복수는 어떤가. 하루 36명, 1분 30초에 한 명씩 자살을 하고, 보험금을 타 내기 위해 아버지가 딸을 폭행하고 있다. 개인이 사회에 복수하고 있다. 개인들은 죽음으로, 폭력으로 사회를 향한 복수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는 자기파괴유전자의 위험을 애써 모른 척 하고 있다. 무엇이 개인을 복수의 신으로 만드는가. 이번 ‘복수시리즈’에서는 오늘날 사회를 과거의 거울로 들여다봄으로써, 시대편의주의적 선택들이 가져 온 치명적 복수를 진단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출산율 저하가 두려운가, 복수는 지금부터다




잔인한 상황을 상상해보자. 누군가에게 도둑의 누명의 씌운 후 40년 넘게 감옥에 가둬 ‘교화’에 성공했다. 그런데 그가 출소하자 바깥세상은 그를 영웅으로 대접했다. 그는 자신을 영웅시하는 지금의 사회를 용서하고 40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보상받았다고 생각할까. 그는 아마 감방의 긴긴 밤을 회상하며 따져볼 것이다, 누가 자신을 감옥으로 내몰았는지. 이쯤되면 우리는 영화 <올드보이>를 떠올릴 수 있다. 복수의 화신, 올드보이를 말이다.
이런 영화적 발상은 시나리오나 스크린 안에만 있는 픽션이 아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주제가 가족이라고 말하면 선뜻 동의할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슬슬 시대의 올드보이, 가족의 복수를 들여다보자.


우리의 경우 60년대 초반부터 가족은 국가의 유지, 발전을 위한 전 국가적 관심의 대상이었다. 물론 이러한 국가의 ‘가족사랑’이 산업화 초기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왜’ 그리고 ‘어떻게’ 가족이 국가권력의 성은(聖恩)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는가에 대한 가능성의 문제이다. 지금이야 출산율 저하로 인한 국가소멸론까지 등장하는 마당에 40여년 전 가족계획사업을 바라보는 게 무에 소용있겠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가족은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파시즘적 일상화에 길들여진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성욕은 우리가 접수한다



1961년 박정희 정권은 대한의사협회를 주축으로 한 대한가족협회의 제의를 받아들여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가족계획사업을 국가우선정책으로 선포하고, ‘성’ 또는 ‘섹스’라는 단어에 알러지 반응을 보이던 성인남녀들의 성기에 콘돔을 씌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불법음란물로 취급되었던 피임약이나 피임기구들이 면세조치를 받으면서 의료용으로 수입시판된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지식인들은 작금의 상황이 모든 악의 근원인 양 호들갑을 떨었는데, ‘남녀의 무사려한 교접’으로 인한 인구의 증가가 ‘거의 절대적인 위험한 존재’로 급부상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차라리 점잖은 편이었다. 부부의 축복으로 추앙받았던 아이는 사회적 재앙 또는 불필요한 ‘입’으로 화했고, 학자의 입에서 섹스에 의한 종말론이 거론되기도 했다. 경제 윤리가 관통한 성욕은 말 그대로 그들에게 ‘접수’됐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적 배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50년대 말까지 줄기차게 인공유산의 보건위생적 위험을 알리고 다산 가구 여성의 보육부담을 덜어야 한다던 주장이 가족계획정책이 시행되자 슬그머니 ‘슬기로운 산아제한’으로 바뀌었고, 남성은 학교에서, 군대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정관수술의 압력과 유혹을 받게 되었다. 그 누가 박정희 장군의 영도 하에 추진된 정책에 불만을 품을 수 있었겠으며, 국가적 재앙을 손 놓고 볼 수 있었겠는가. 이후 정부의 전 부처는 매 보고시 가족계획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나름의 대안과 사업진행방안을 제출하도록 요구받았다. 각 마을의 부녀회장은 가가호호 방문하여 가임여성의 섹스 횟수와 피임의 여부, 질내 사정 여부를 체크했고 이장은 정기적으로 이를 상부에 보고했다. 이민과 노동력 수출, 우생보호법 제정 검토 등은 당시 국가가 얼마나 전 방위적으로 인구감소에 혈안이 되었는지, 정확하게 말하면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면 어느 수준까지 ‘올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1.19와 1.2.3 운동


선전하기에 가족은 국가의 기본단위라고, 사랑의 안식처라고 했던가.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의 위상은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적 성형수술에 의해 조작되었고, 함량과다로 판단된 나머지 인구조절 정책의 실질적 메카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앞에서 기술했듯이, 그것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구상되는 과정에서 장애물로 간주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이 과거의 얘기만은 아니라는 점을 직감할 수 있다.


경제성장을 위해 섹스 도중에도 죄의식을 느껴야만 했던 한국의 가족은 예측치 못한 상황에 직면했다. 이 상황의 배경은 무엇보다도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경제적 이해’에 충실한 나머지 출산 자체에 대한 사회적 터부를 체화함으로써 달성하고야만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최고 속도의 고령화다. 또한 가족관의 변화와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가족을 통하지 않고도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는 강력한 경험적 증거들은 인구조절정책의 산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결코 무관한 것만도 아니다.


경제성장에 목을 매고 달려든 결과, 과거의 가족은 거세되었고 현재의 가족은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국가 단위의 가족정책은 가족에 메스를 가했고, 경제 단위의 기층에서는 당장의 이익을 위해 출산을 통제해왔다. 그런 결과 2002년 출산율은 1.17, 2003년에는 1.19로 세계 최저 수준을 자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너나없이 걱정한다. 나라가 망한다고.
얼마 전 한국모자보건학회는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구 대한가족계획협회)와 함께 <1.2.3>운동을 전개했다. “결혼 후 1년 내에 임신을 해서 2명의 자녀를 30세 이전에 낳아 잘 기르자”는 취지의 권장사항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서도 우리는 가족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가족이 국가경제를 위해 동원되어야 할 유용한 자원이라는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면 성기와 성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시각에서 그 동안 줄기차게 이용만 당한 가족의 배신감이 상쇄될 수 있을까. 이제 우리는 국가의 ‘종말’을 막기 위해 낯뜨거운 잠자리 일을 말해야 했고 생식능력이 박탈당했으며, 사교육비의 증가와 임신 여성에 대한 기업 내의 차별이 현존하는 상황에서 ‘출산 보이콧’이라는 극단적인 복수를 준비하는 가족을 역사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1.19. 이 숫자를 통해 전 방위적 폭력에 노출된 가족은 말한다. 복수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고.




김성욱 편집위원 barrierfr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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