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호 [사설 2] 1998년의 5·18, 그 다음 날
 
 

109호 [사설 2]

1998년의 5·18, 그 다음 날

 

아주 많은 벽들이 만들어지고, 그 벽 속에 스스로 들어가 앉으면서 비로소 ‘신비’는 배태된다. 더욱 큰 불행은 그 신비감이 전혀 비밀스럽지 못한 경우에 있다. 신비감은 강압적으로 다가오거나 우스꽝스럽게 다가온다. 최근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여러 양태를 보다보면, 그 허술한 벽들이 언제 내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 것인지 위태위태한 감이 크다. 지자체선거를 겨냥한 ‘딴나라당’-‘헌정치 궁민회의’의 지리한 논쟁은 필수인 듯 싶다. 교수 임용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비리의 폭로도 별반 새로움이 없다. ‘5·16’은 그냥 5월 16일인 듯 싶게 넘어가는 김종필이 5·18을 추모하는 자리에 나타난 것도 정치논리의 소산일 뿐이다. 우리 나라의 언론의 현주소를 드러내는 KBS의 ‘문제적’ 프로그램의 방영을 둘러싼 갈등도 투명하게 우리를 가두는 둔중한 벽을 실감케 한다. 불심검문에 걸려 단지 단과대의 깃발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구속되기에 이른 우리 후배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몇 천명 때려죽이는 것보다 몇 천만명을 기만하는 것이 좀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측면에서 우리 나라는, 분명, 인도네시아보다는 나은 상황이지만, 정권의 교체에 의해 그 벽의 존재가 가시화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상황은 여전히 후진적이다. 강압적이지 않은 대신 우습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인 것이다. 또 이 우스움을 조장하는 요소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제도화되고 있는 것들 가운데서 그 유동하는 정신 그대로 다시 이 자리에 되살릴 때, 아직 투명한 벽에 갇혀 이 자리에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 것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인도네시아보다 좀더 나은 상황의 우리 나라에서도 지식인이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5·18의 제도적 측면이 언론을 통해 강하게 다가오는 올해의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누구나 다 그 벽의 바깥을 직시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온몸을 던져 그 벽에 부딪칠 수 있는 용기 또한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벽이 거대하게 느껴질수록 벽이 없던 세상을 그리게 된다. 올해 5·18은 이 속에서 지나게 된다.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잠이 들었다가도 언제나 별을 바라보기 위해서/잠이 든 채로 그대로 눈을 맞기 위해서/외롭게 떨어지는 별똥별을 위해서/그 별똥별들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어린 나뭇가지들을 위해서/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가끔은 외로운 낮달도 쉬어가게 하고/가끔은 민들레 홀씨도 쉬어가게 하고/가끔은 우리를 위해 우시는 하느님의 눈물도 받아두기 위해서/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아침에 누구든지 일찍 일어나 새들의 집을 한 번 들여다보라/간밤에 떨어진 별똥별들이 고단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다/간밤에 흘리신 하느님의 눈물이/새들의 깃털에 고요히 이슬처럼 맺혀 있다’(정호승,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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