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호 [사설 2] 정주영이 북으로 간 까닭을 넘어
 
 

111호 [사설 2]

정주영이 북으로 간 까닭을 넘어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소 5백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가는 모습은 장관임에 틀림이 없다. 수구초심(首邱初心)이란 말도 있듯이, 북에 고향을 둔 노인네가 그곳을 찾아 간다는 대목에서는 가슴 뭉클해지는 바도 있다. 자본가가 이윤의 확대를 위해 그러는 것이라는 비아냥이 있을 수도 있지만, 현재 북한의 상황을 전제한다면, 그것은 별로 설득력 있게 다가서지 않는다. 생존 문제 앞에 내던져진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닐 성 싶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중요한 점은 남북 관계의 호전일 것이다. IMF라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 급급해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북에서 진행되고 있는 ‘고난의 행군’을 보며 신기하게 들여다보던 일이 엊그제이다. 그러면서 생각하던 것이 겨우 ‘흡수통일’의 시기 맞추기 아니었나. 다른 나라의 지원까지 앞장 서서 막아서던 정권도 문제였다. 장기적인 전망을 발전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겨우 ‘통일 비용’을 계산하는 정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자연발생적인 민족적 감정까지 이적행위로 몰아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북한의 붕괴가 곧 남한의 흡수 통일이라는 등식은 어떻게 성립하는 것인가.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은 너무도 순진한 상상이다. 이는 붕괴 후 나타날 수 있는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하고 그 결과를 추론해 보면 명백해진다. 첫째, 북한 당국에 이후의 진로를 물을 경우가 존재한다. 지난 대선 과정에 나타났던 남북 정권의 밀월이 어떤 효과를 가질 지 모르지만, 붕괴 이후란 배경 속에서 북한 정권이 어느 정도의 영향을 확보할 지는 의문이다. 중요한 것은 북한 주민들의 판단일 텐데 작금의 분위기로 봐선 그리 긍정적일 것 같지가 않다. 같은 민족이라고 있는데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기껏 한다는 일이 쪽박 깨는 일 아니었나. 그것도 ‘삶과 죽음의 길이 예 있는데’, 그 갈림길에서의 행패였던 것이다.

둘째는 강대국의 개입이다. 엔화의 가치가 하락하는 배후에 미국의 거식증이 존재하고 있음은 이제 만천하에 알려졌다. 또한 국제회의가 거듭될수록 중국의 굳건한 위상이 확인되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과연 정권이 무너진 국가를 이들이 가만히 놔둘까. 북한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전제한다면 이러한 우려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북한과의 적대성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온 남한은 이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과연 최소한의 도덕적 정당성만이라도 확보한 이후 논의는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현재의 추세로 나가다간 어느 경우에도 긍정적 결과를 예상하기 힘들다. 정주영의 방북이 단지 흥미거리로 느끼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통일은 먼 미래의 일도 아니고, 시간이 났을 때 관심을 가질 일도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통일을 얘기해야 한다. 감상적 통일운동의 비판은 여기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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