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호 [사설] 우리가 정말 언론의 한 보루가 된다는 말인가
 
 

142호 [사설]

우리가 정말 언론의 한 보루가 된다는 말인가

 

일곱 평 남짓한 대학원 신문사는 온갖 불온한 문화의 온상이다.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펌프’를 하러 달려가는 편집위원들이 있는가하면, 빈자리를 책으로 가득 채워둔 채 코빼기도 안 보이는 몰지각한 편집위원도 있다. 이러한 몰지각한 정신은 고스란히 신문에 반영된다. 툭하면 원고청탁은 펑크나기 십상이고, 그렇게 기획의도를 강조했건만 날아오는 메일의 내용은 황당하기 그지없다.심지어 인터넷을 타고 날아오는 메일의 속도는 때로는 3박 4일을 넘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몰지각한 현상은 사회적인 것이어서 아무런 연락 없이 교수시론을 펑크내는 본교 교수를 두 명이나 만나기도 하였다. 문제는 본인의 공식적인 사과를 아직까지 받아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넌지시 생각해본다. 과연 중앙 일간지였다면 약속을 어겼을까. 나아가 토시 하나 바꾸는 것에 민감한 일부 교수를 만나게도 된다. 물론 자신의 자식과 같은 글에 생채기 하나 가는 것에 마뜩스럽지 않은 것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최소한 신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편집권은 전적으로 일임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 점에 있어 주저함이 없었다. 넘치면 짤라라.

물론 언론에도 격이 있고, 급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로 따져보면 대학원 신문은 학교의 자본으로 만들어지므로 광고도 없는 탓에 자본에 흔들릴 위험은 거의 없다.
때문에 격조로 따지자면 그 어느 신문 못지 않게 고색창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편집장의 약간 날라리 같은 편집 기조에 편집 위원들은 아연 실색한다. 좀 더 학술적이거나 진지하지 못하다는 거다. 그러나 이번 편집장은 그래서 주장했다. 자본에 얽매이지 않음으로 좀 더 자유로운 형태의 신문을 만들 수 있는 거라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그는 좀 순진했다. 여전히 현실들은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변동요인을 감안하지 못한 탓에 신입편집위원이 3명이나 대거 투입된 이번 학기는 과거의 전통을 유지하는데 급급하고 만 것이다. 또한 우리들의 상상력이라는게 여전히 빈곤하거나 답습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무튼 이 귀중한 경험을 전하고 싶은 이유는 신문사를 둘러싼 여러 권력이라는 것이 참으로 미묘하다는 것이다. 총학생회를 비롯한 여러 계열의 관계 속에서 자력갱생하도록 되어 있는 신문사는 폐쇄적이 되기 쉬운 구조를 가졌다.

충분한 도전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급격한 인력변화는 항상 한 학기를 신문이란 무엇인가를 배우는 시간으로 넘긴다.문제는 자신이 갱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을 쉽게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학원 생활 모습과도 비슷하다. 무언가를 얻고 싶어 대학원을 찾았건만 시간만 허비하다 짜집기된 논문으로 시절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 대학원 신문에 짜집기된 수많은 글들을 보며, 마치 머리 앞에 다가온 논문의 운명을 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뿐인가. 원우들에게 청탁한 원고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학생 레포트 수준일 경우가 많다.

철학이 빈곤한 글들을 대하며 피워댄 담배 연기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그러므로 순수함이란 단어는 이제 포기해야 될 때가 온 것 같다. 대학원 신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 영악해질 필요가 있다. 특히 이번 등투에서 가져 오게된 선제작비 지원은 좀 더 단단하게 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제 남은 자들에게 좀 더 비약할 것을 권고한다.
유치뽕 신문들처럼 여학생들 뒤꽁무니나 들추려는 교수들도 좀 고발하고, 영악하게 신문의 전략을 세워라. 나는 졸업한 선배들과 선데이 대학원 신문을 창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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