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호 [사설] 대학원신문을 위한 변명
 
 

149호 [사설]

대학원신문을 위한 변명

 


후지따 쇼오조오는 ‘논단의 지적퇴폐’라는 글을 통해서 1960년대 일본의 학문세계에 팽배해 있던 한 경향을 비판했다. 굳이 쇼오조오의 말을 빌리자면, ‘평론은 사라지고 리뷰만이 판을 치는 시대’라는 비판이었다. 지식인들은 때로 자신의 말에 잘 들어맞지도 않는 근거를 들이대기도 하고, 약점만을 잡아 크게 부풀리면서도 그것을 해결할 방안에 대해서는 뒷짐을 지고 다른 이에게 떠넘기곤 한다.

이 글을 보고 있는 대학원생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위치에 놓더라도 일종의 지적 양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치기구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는 대학원신문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언론을 자임하고 있는 한 대학원신문사는 독자인 대학원생의 처지와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의 이상인 지식인으로서의 임무라는 것에 의해서도 견제를 받게 된다. 어찌 보면 대학원신문사는 그 삼각관계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바랐건 바라지 않았건 주어진 조건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읽히지 않는 신문이라는 상황은 그 독자의 수와는 상관이 없이 대학원신문사가 터하고 있는 본래의 위치를 잘 유지하고 있는가를 되묻기 때문이다. 대학원신문이 그 한 축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낸 것일까. 종간호를 앞두고 매 학기 되풀이되는 고민에 신문사의 분위기는 무겁게 내려앉는다.

하지만 대학원신문사가 언론임을 자임하고 그 안의 편집위원들이 글쟁이로서의 고민을 가지고 있다면 앞서 언급한 쇼오조오의 말을 기억했으면 한다. 지적퇴폐라는 말은 고민의 양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고민의 질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어떤 편집위원이건 한동안은 ‘많이 읽힘’이라는 것에 대한 강박증에 시달린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독자 수라는 것이 말의 수사에서가 아니라 말의 진정성에서 생겨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어떤 사실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딴지를 거는데 몰두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지식은 뇌 속에 침잔해 있으면 부식한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용도에 사용되면 퇴폐한다. 대중 지성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지식은 여전히 권력이다. 지식의 퇴폐는 부식보다 더 부정적이다. 조금씩 알아간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공포다. 대학원신문사의 편집위원들은 그 특성상 대학원의 살이라는 것이 얼마나 퇴폐적이며, 가공할 정도로 부식되어 있는지를 매일매일 목격한다. 그 만큼 1년 정도의 편집위원 생활이면 마음속에 커다란 생채기 하나 정도는 생겨 있을 것이다.

이번 한 학기 신문에서 강조한 것은 ‘입장’이다.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내어 누구든 만족시킬 수 있는 신문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대학원생들과 갈등하며 경계를 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대학원신문은 대학원생의 등록금으로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자유롭게 우리 자신과 부딪히고 갈등하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본질적인 갈등이 없으면 본질적으로 퇴폐한다. 이번 학기 대학원신문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우리의 원칙이 ‘입장’이었듯 여전히 ‘입장’을 견지함을 근간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주변에서 이번 신문은 경직되었다고들 말하지만, 그 경직성이 우리의 아집이 아니라 그 아집을 통해서 지키려고 했던 입장 때문이라면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그 정도의 경직성은 유지해 나가길 빌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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