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호 [깊이읽기] <문자제국 쇠망약사>(생각의 나무, 2004)
2004-11-03 08:48 | VIEW : 412
 
[깊이읽기] <문자제국 쇠망약사>(생각의 나무, 2004)

 


탈근대적 ‘전자·영상’ 시대의 도래



정정호 / 영어영문학과 교수

작지만 놀라운 이 책의 저자 이남호는 책의 부제가 말하듯이 “문자시대는 가고 전자시대가 왔다”는 주장을 한다. 그는 6편의 글에서 캐나다의 전자문명이론가인 마셜 맥루한을 따라 세상의 모든 변화를 전자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문자제국의 쇠망과 전자제국의 번성이라는 관점으로 전자문화와 문학과 책과 독서와 내면성과 월드컵에 대해서 깊은 인문학적 사유를 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맥루한은 독창적인 매체문명론 즉 “매체(미디어)는 전달내용(메시지)이다”라는 유명한 슬로건을 내걸었다. 맥루한의 이론으로 인식의 충격을 받은 저자는 이 책에서 18세기 영국의 계몽주의 역사가인 에드워드 기번의 대저 <로마제국의 쇠망사>(대광서림, 2003)의 통찰력에 의지하여 거대하고 강력했던 문자제국이 우리 시대에 어떻게 쇠망하는가를 짚어본다.
첫 번째 글 ‘전자사막에서 살아남기’에서 저자는 맥루한이 플레이보이지와 했던 인터뷰 중 주요부분을 발췌하여 인용하면서 그것과 관련된 저자 자신의 상념을 덧붙이는 특이한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맥루한의 말에 동조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의문을 던지면서 전자문화 시대에 관해 맥루한과의 가상대화를 시도한다. 저자는 맥루한의 말대로 세상의 엄청난 변화는 모든 분야에서 심각한 정체성 문제를 초래하기에 새로운 전자문화시대에 이런 변화를 무조건 거부하거나 무조건 따르는 두 가지 태도 모두를 비판하며 변화의 깊은 흐름을 감지하고 거기에서 진실한 정체성을 구하려는 노력을 주문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으로 저자는 02년 전 국민을 월드컵의 열광으로 몰아넣은 사건을 전자문화적 현상으로 규정짓는다.
전자문화 시대는 무엇보다도 ‘개인성과 내면성의 약화’를 불러왔고 이러한 문화적 변화는 90년대 이후 한국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전자시대의 이러한 ‘내면성 약화’는 곧바로 ‘문학의 내파(內破)’로 이어져 문학의 위대성은 여지없이 파괴되고 만다. 윤대녕, 구효서, 김영하, 신경원, 박성원 등의 소설작품에서 영상문화, 전자문화, 디지털 문화의 번성 속에서 무너지고 있는 문학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문자문화시대의 가치 있고 경건한 활동인 독서활동도 전자문화시대에는 고귀한 행위가 되지 못한다. 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마지막 글인 ‘문자제국쇠망약사’이다. 저자는 오늘날 책 속에서 문자가 사라져가는 현실을 5단계로 약술한다. (1)문자의 독주 (2) 북 디자인 반주를 곁들인 문자 리사이틀 (3) 문자와 그림의 이중주 (4) 문자 반주를 곁들인 디지털 이미지 리사이틀 (5) 연주될 수 없는 음표로서의 문자가 그것이다. 저자는 각 단계의 대표적인 책들을 칼라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문제제국의 총아인 책들조차 점차 문자성이 약화되고 문자성의 의미가 쇠퇴하고 시각 이미지가 강해지는 그래픽성이 강조되어가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저자는 결론에서 독백처럼 말한다. “이러한 문자와 책의 사라짐을 보면서 나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나는 문자제국의 쇠망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낙관적으로 노래할 수는 없다.” 문자의 들판에서 문학이라는 곡식을 먹고 성장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세상은 나에게서 보수와 과거를 읽고 가나 나는 그들의 미래가 되고자하는 희망을 강력히 피력한다. 그런 까닭인지 이 책의 표지도 전자시대에 맞는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72개의 작은 구멍이 난 표지는 모니터에 나타난 어떤 게임의 한 장면 같다. 책 제목이 오른쪽 구석에 아주 작게 그것도 세로로 옹색하게 배치되어 있는 표지에서 전자문화에 짓눌려 쇠망하는 문자문화의 모습이 뚜렷하다. 이 책은 전자시대의 문학과 문화 이해에는 큰 도움을 주지만 문자문화와 전자문화 문제에 대한 대안제시에는 별 진전이 없어 보인다. 문자·책·문학 문화라는 ‘근대의 가을’에 서있는 우리는 안타까움으로 우울하다. 우리는 결국 맥루한 류의 전자문화 우위에 기초를 둔 매체결정론에 함몰되어 문자·책·문학의 위기에 대한 시원스런 대안제시를 하지 못한 채 쓰러져가는 문학의 고목 아래서 서성이며 전자제국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저자의 예리한 분석을 토대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 오늘날 인문지식인 모두에게 남겨진 숙제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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