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호 [학술] 경제방법론과 비판적 실재론
2005-05-15 18:22 | VIEW : 78
 
경제방법론과 비판적 실재론


 

비판적 실재론은 아직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론이다.
하지만 최근들어 우리사회에 이 비판적 실재론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어온 포스트모더니즘과 실증주의 과학전선의 사회이론
가운데 양자택일이 아닌 두 사회이론의 문제의식을 동시에 공유하는 것이
바로 비판적 실재론이다. 영국중심의 유럽학문이지만 사회문제를 광범위하게
조명함으로써 그 의미를 새롭게 하고 있는 가운데 과연 비판적 실재론은
어떤 방법론이며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에 이 이론의 탐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알아보도록 하자. <편집자주>
 




경제학의 존재론적 성찰




이덕재 / 노사정위원회 전문위원






60~70년대 들어 과학철학의 영역에서는 쿤과 파이어벤트 등에 의한 상대주의와 사회철학적으로는 맑스주의의 위기와 함께 푸코, 데리다 등으로 대표되는 회의주의적 경향이 확대되기 시작한다. 경제학적으로도 가치론과 화폐론 등을 중심으로 맑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서구에서 전후 20여년간 케인즈적 거시경제관리에 의한 황금기 이후 발생한 70년대의 경제적 위기로 케인즈주의 역시 붕괴되었다. 로이 바스카(Roy Bhaskar)의 주저 <실재론적 과학이론: A Realist Theory of Science(1975)>에 의해 주도된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은 이러한 지적·현실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하였다.


인간사회의 해방적 가능성을 제시하다




바스카는 비판적 실재론이 대상에 대한 ‘설명적 비판(exp- lanatory critique)’을 통한 과학의 ‘해방적 가능성(emancipatory potential)’을 제시한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 테제는 회의주의가 증대되던 시기에 결국 사실과 가치간의 차이을 메워보려는 기획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후 과학일반을 지배하고 있던 실증주의에 대한 포괄적인 대안으로서 과학에 대한 체계적인 실재론적 설명을 개발하고, 산파로서 ‘과학을 위한 철학’을 제시하려 했던 바스카의 작업은 특히 영국을 중심으로 다양한 학술 및 연구조직을 형성하면서 맑스주의, 조절이론, 포스트 케인지언 이론 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물론 이러한 기획은 단순히 과학일반의 방법론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인간사회의 해방적 기획도 포함한다.


‘비판적 자연주의’와 ‘초월적 실재론’에서 조합된 비판적 실재론은 경험주의에 비판적이며 실재론이 관념론에 우선한다는 테제를 표현한다. 표면적 현상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경험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표명함과 동시에 그 현상을 발생시키는 구조 또는 ‘발생적 메커니즘’이 이론적인 구성물로서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또한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실재론적인 것이다. 따라서 바스카의 접근은 대부분의 사회철학자들과 달리 존재론적이다. 존재론을 인식론로 분석·환원해온 기존의 접근 방법은 인식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경제학방법론의 역사는 과학철학의 조류를 반영하고 있다. 19세기까지 독일중심의 형이상학적 방법론은 19~20세기에 눈부시게 발전하는 과학적 지식의 발전에 따라 설명의 한계에 봉착하고 비엔나학파를 중심으로 한 논리실증주의가 이를 대체한다. 경제학에서도 실증주의적 방법은 허치슨의 소개로 본격적으로 수용된다. 허치슨은 영국의 리카아도적 방법론전통을 격렬히 비판하면서 경제학에서 경험적 검증의 근본적 중요성을 주장한다. 이러한 노력 등으로 40년대 들어 실증경제학방법론이 정착하게 되는데 이는 결국 당시 과학철학 내에 강한 조류를 형성하고 있던 논리실증주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30~40년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경험적 경기순환연구 및 40년대 이후 눈부시게 발전하는 계량경제학적 방법의 개발 또한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60년대 프리드만의 <실증경제학의 방법론>이라는 논문을 중심으로 한 논쟁을 거치면서 실증경제학적 방법론은 일반경제학자들에게까지 광범하게 보급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경제학원론 교과서가 가치중립성을 내세우면서 서술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방법론적 흐름이 반영된 탓이다.


그러나 과학철학 및 사회철학이 60~70년대 들어서면서 위기를 맞게 되듯이 확고해보이던 실증경제학적 방법론 역시 여러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반증이라는 계량경제학적 방법론의 적합성, 가치판단의 문제에서 역사적·사회적 요소를 배제할 수 있는가에 관한 의문 등 방법론적 비판도 한몫했지만, 70년대 경제적 위기에 따른 거시계량모형의 예측능력의 실패는 설명과 예측이라는 과학의 기본적 성격에서 치명적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비판적 실재론, 경제 방법론에서의 성장




이런 상황에서 주류의 경제학방법론은 쿤과 라카토스를 중심으로 한 과학철학의 한 언저리로 주변화된 반면, 일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경제학을 과학의 우월한 지위에서 끌어내려 문화의 한 현상으로 이해하는 극단적 경향으로도 나타났다. 맥클로스키의 수사학(rhetoric)이 대표적인데 그녀에 따르면 과학적이라는 논의들도 문학에서처럼 상징, 은유 등의 수법들을 사용하고 또한 실상 수많은 상식적 판단과 직관, 규범적 사고들로 이루어져서 전적으로 경험연구와 연역적 추론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주류경제학비판 또한 맥클로스키와 같은 궤도에서 실증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맥클로스키가 과학 역시 문학과 같은 인간사고의 산물로 보는 반면, 케임브리지 대학의 토니 로손의 경우 실재론적 관점에서 가치중립성을 비판하고 있다. 로손의 주류경제학비판은 비판적 실재론이 가장 구체적으로 사회과학·경제학방법론에 수용되고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현대 경제학의 두 가지 주요 특징을 사건규칙성과 원자론적 개인에 기초한 사회이론으로 규정하는 로손은 바스카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이어받아 현대 주류 경제학이 사회적 존재 혹은 실존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게을리한다고 규정한다. 그리고 혼돈과 비정합성으로 점철된 신고전파 현대 주류 경제학의 실패의 이면에는 실증주의의 연역주의가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뿌리를 흄에 둔다. 그리하여 앞으로 경제학방법론의 방향은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연역주의적 추론방식 및 실증주의적 이론을 거부하는 대신에 과학과 설명에 있어서 초월적 실재론적 관점을 수용하는 데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이 안정적으로 일정한 담론을 형성하는 것과 달리 로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비판적 실재론의 경제학적 적용은 불안정해 보인다. 주류경제학의 존재론적 전제로서 경험적 실재론 및 실증경제학의 성격 여부, 로손의 초월개념의 적절성 그리고 대안제시의 모호성 등에 관한 심각한 반론들이 제기되었다. 물론 그것이 비판적 실재론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은 아니다. 캘리니코스 등 적지 않은 논자들이 그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이지 않다. 이론적 현실적 혼돈기에 나름의 대안을 모색중인 영국의 비판적 실재론이 과연 ‘무엇’의 산파로서 역할을 하게 될지 긍정적인 가능성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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