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호 [학술기획] 비판적 실재론의 함의 - 경험으로부터 실재로의 도약
2005-05-31 15:57 | VIEW : 60
 





[학술기획] 비판적 실재론의 함의











이기홍 / 강원대 사회과학과 교수







비판적 실재론은 과학이란 어떤 특징을 갖는 지식탐구 활동인가를 밝히는 견해(초월적 실재론), 사회과학은 어떤 특징을 갖는 지식탐구 활동인가를 밝히고 이것으로부터 사회라는 실재의 구조와 성질을 해명하는 논의(비판적 자연주의), 사회라는 실재의 고유한 특성에 의해 사회 이론은 ‘평갗와 ‘비판’이라는 가치함축을 갖는다는 점을 논증하는 주장(설명적 비판이론), 비판적 실재론을 변증법적으로 풍부화하고 일반적인 변증법 이론을 발전시키려는 시도(변증법적 비판적 실재론)의 네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이들 구별되는 네가지 지식 가운데, 비판적 실재론은 초월적 실재론과 비판적 자연주의의 지식만으로도 철학이나 인문·사회과학들에 대한 새로운 도전으로 평가받았다. 때문에 ‘사회과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갗와 관련해서는 이 둘을 검토하더라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은 추측이다




과학활동을 ‘추측과 기각’으로 특징짓는 포퍼는 과학이, 추측하여 가설을 만들고 이와 관련된 증거들을 수집하다 반대되는 사례가 발견되면 그 가설을 기각하는 활동이라고 파악한다. 또한 가설에는 연구자의 직관을 비롯한 온갖 비합리적 요소가 작용하지만 그렇게 획득된 가설을 시험하는 과정은 논리적으로 진행되며 지식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는 이 과정이 과학의 합리성을 보증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포퍼의 견해에는 약간의 정확함과 훨씬 더 많은 부정확함이 있다.


먼저, 가설들 가운데 경험적으로 시험가능한 것들은 희소하고, 시험가능한 상황에서도 가설과 반대되는 증거가 발견되었다고 곧 ‘추측을 기각’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특정이론이 밝히고 있는 실체나 구조, 인과기제보다 훨씬 더 많은 실재들로 구성되어 있고, 특정이론이 진술하는 현상은 그 이론에서 다루는 객체의 작동을 다른 실재들이 간섭하거나 방해하지 않는 한에서만 발생한다. 시험가능한 가설이 있다고 해도 그 가설을 경험적 증거로 시험하는 일은 복잡한 작업이다. 즉 경험적 시험이 과학적 지식을 정당화한다는 주장은 과학에서 예외적인 경우에만 정확한 것이 된다.


또한, 과학자들이 가설을 대담하게 추측하지만 이것이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과학은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으로부터 ‘어떤 것’을 찾아내는 활동이다. 예컨대 지진이나 화산폭발 현상을 목격하고, 지각아래 맨틀이란 실체가 판으로 이루어진 대륙이 움직이는 과정에서 문제의 현상을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비판적 실재론은 과학적 작업이 일정한 경험적 유형들을 판별해낸 후 그 유형들을 발생시킨 인과적인 힘이나 기제에 대한 추론으로 나아가는 ‘이단계적 방법’에 의해 진행된다고 특징짓는다. 즉 과학은 경험적 증거로부터 그 경험을 발생시킨 세계속의 실재들을 찾아내어 그 경험을 설명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세계에 존재하는 실재들은 대체로 직접 관찰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자신의 사유능력과 그밖의 도구들을 사용하여 실재를 추정하고 그 실재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시도한다. 과학적 작업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실재의 재구성으로의 도약’에 있다.  


결국 ‘가설’은 세계에 존재하며 문제의 현상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추정하여 사유속에 재구성한 실재에 관한 체계적인 진술이다. 과학의 역사에서 가설들이 추정한 실체들 중, 플로지스톤과 유전자의 경우는 존재하는 실체들 자체와 과학자들이 존재한다고 추정하여 사유속에 재구성한 실체들은 유사할 수도 있고 상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것은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인간의 지식이 언제나 오류일 수 있으며 인간의 인식적 실천의 발전과 함께 기각·수정·발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경험을 발생시켰을 실재를 사유속에 재구성하는 작업에서 과학자들은 연역과 귀납, 가추나 역행추론, 유추, 모델구성 등 다양한 사유방법들을 동원하여 활용한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비판적 실재론은 이러한 다양한 사유방법들을 탐구의 대상 및 목적에 따라 적절하고도 능숙하게 사용하는 능력이 과학적 작업에서 특히 중요하며, 뛰어난 과학자란 바로 이런 능력이 탁월한 과학자라고 강조한다.



비판적 실재론 사회과학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연구는 사회세계에서 경험되는 현상들을 실재들의 작용의 결과로 설명하는 활동이다. 예컨대 여성이 받는 차별현상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가부장제’라는 실재를 추정해내고 그 실재의 작동으로부터 문제의 현상이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사회연구에서도 ‘경험으로부터 실재로의 도약’, 즉 문제의 현상을 발생시켰을 ‘실재들’에 대한 추정은 핵심적으로 중요한 과제이다.
실재로 도약하는 과제수행을 위해 많은 사회연구자들이 이른바 ‘과학적 방법’ 획득을 열망해 왔다. 그런데 사회연구자들 가운데,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이 자료만 집어넣으면 자동적으로 과학적 지식을 생산해내는 기계처럼 작동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특히 통계적 방법에 대해, 어떤 사람이 사용하더라도 동일한 자료를 넣으면 동일한 결과를 산출하는 ‘객관적인 장캄, 즉 ‘과학적 방법’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비판적 실재론을 ‘산파’로서 역할해줄 것을 기대하면서 사회과학이나 경제학 연구에 ‘적용’하는 사람들도 비판적 실재론이 자동적으로 지식을 산출하는 장치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적 현상이 원인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한, ‘경험으로부터 실재의 재구성으로의 도약’을 자동적으로 낳는 과학적 방법은 있을 수 없다. 맑스, 케인즈, 그람시 등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소득분배라는 현상으로부터 잉여가치라는 실재를, 공황이라는 현상으로부터 유효수요라는 실재를, 그리고 동의된 지배라는 현상으로부터 헤게모니라는 실재를 사유속에 재구성함으로써 사회세계에 대한 지식을 발전시켰다. 그들의 성과는 특수한 ‘과학적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통찰력과 창조적 상상력을 적절히 활용하여 얻은 것이다. 비판적 실재론의 핵심적인 주장은 사회연구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실재의 재구성으로 도약’은 오직 연구자 자신의 통찰력과 창조적인 상상력의 활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통찰력과 상상력의 적절하고 정확한 사용에는 재능과 함께 훈련이 필요하다.
특정의 방법이나 기법에 사로잡혀 그것이 자동적으로 과학적 지식을 산출할 것으로 기대하는 연구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경험으로부터 그 경험을 해명해 줄 실재의 재구성으로 도약하고자 한다. 이런 탐구를 굳이 비판적 실재론적 사회과학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다만 그런 실재를 추정하는 작업에서 사회세계에는 심리적 실재와 구별되며 개인에게 환원될 수 없는 ‘사회관계들’이라는 실재가 그것에 고유한 성질과 힘을 가지고 존재하며 작동하고 있다는 비판적 실재론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경험으로부터 실재로의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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