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호 [학술참관기] 제2회 맑스꼬뮤날레 <맑스, 왜 희망인가>
2005-06-18 19:21 | VIEW : 37
 




학술참관기 : 제2회 맑스꼬뮤날레 <맑스, 왜 희망인가>


희망과 한계를 보다






 

심성보 / 문화연구 시월 연구원






맑스꼬뮤날레(이하 꼬뮤날레)는 오늘날 한국좌파들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흐름들이 합창을 하는 자리이다. 제2회 꼬뮤날레는 ‘맑스, 왜 희망인갗를 화두로 맑스와 맑스 이후 좌파적 경향들의 접점을 모색하였다. 우선 꼬뮤날레의 희망은 상이한 이론 간 소통을 위한 공통의 지형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좌파는 항상 대안적 세계-주체구성을 탐색해왔다. 최근의 유행인 ‘차이’와 그 변종들도 다르지 않다. 긍정적이게도 최근 10년간 유행을 이제야 조금씩 소화하여 논의가 올라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꼬뮤날레의 전체 주제발표와 주관단체별 발표가 이런 경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신’경향보다 ‘구’경향이 더 두드러졌다. 나는 아래에서 발표-토론의 형식, 논의수준, 논의경향, 좌파문화 등 네 측면에서 간략한 평을 하고자 한다.




 

소통은 있되 논쟁이 없는




첫째, 꼬뮤날레의 발표 및 토론의 형식이다. 대부분의 발표자가 30-40분 정도 발표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어버림으로써 사실상 내실 있는 토론, 질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정된 시간에 적합한 발표방식의 고민을 했어야 했다. 또 주관단체별 세션 자체가 이미 정치적, 이론적으로 분파화하여 끼리끼리 따로 뭉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즉 꼬뮤날레의 취지와 달리 전혀 축제적이지 못하였고 대화부재의 장이자 세력과시의 장이었을 뿐이다.


둘째, 논의수준면에서 심각한 퇴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대학원 강의 수준보다 못한 발표와 세션들도 다수 있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10년 전 수준 또는 더 과거로 되돌아간 주장들도 많았다는 점이다. 과거의 글들, 작업들을 짜 집어 재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특히 지난 10여 년 간 국내외의 이론적, 실천적 논의들을 무시해버리는 폭력적 글쓰기는 가히 재앙 수준이었다.


셋째, 논의경향의 수렴점은 ‘구성/과정’과 ‘수행(修行)’이었다. 우선 ‘구성/과정’은 대부분 구호에 그쳤다. 여전히 좌파들은 대중-나의 삶의 생동하는 정치를 특정 상(像)으로 환원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어쩌면 더 심각한 것인데, (계급, 다중, 개인, 제도 등등의) ‘역능’, ‘능력’, ‘수행’, 결국 도통(道通)으로 모아지는 개인주의적 정치의 대두를 또 하나의 수렴점으로 들 수 있다. 물론 이 개념들이 (신)자유의적 용법과는 다르지만, 문제는 주체의 형성 전략으로서 대안이 전혀 없는 수사적 선언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수사적 선언으로 좌파의 아마추어적 노력보다 몇 배나 강력한 기업-자본의 구성적 역능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넷째, 꼬뮤날레는 진정한 좌파문화에 대한 반성을 보여주지 않았다. 앞서의 문제점들은 다양한 흐름들의 충돌을 만들어 내었지만, 우리들의 좌파문화 자체에도 강력한 동학이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새삼스럽지만 꼬뮤날레에서 사대주의적 학문하기, 그로부터 비롯되는 분파주의, 밥그릇 지키기, 연줄 패거리주의, 성 및 가부장적 문제에 대한 침묵이 있었고 사실상 이런 분위기가 지배했다. 이런 문화가 연구자와 대중 사이의 소통을 단절시키고 자집단 내 입장정리로 끝나는 방어적 논의행태를 낳았다. 또 이로부터 좌파의 이론적 신화 만들기가 행해진다. 즉 교주(敎主)를 세우고 특정 정파가 그를 선점하고, 자신들의 입장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절대 대화하지 않는다. 타자들의 이론(異論)제기는 ‘오해’이거나 ‘몰이해’이거나 ‘구파’이거나 ‘오역’이다. 이런 문화는 자집단 내에서 자유로운 생각을 억압할 뿐 아니라 타집단과의 효과적인 경쟁관계를 산출해지 못하는 병폐적 언어집착이자 나아가 정체성 보호본능일 따름이다.




 

과거로의 회귀인가




더 심각한 좌파문화는 좌파의 폭력적 글쓰기와 말하기 방식이다. 자신들의 현입장 및 실천을 대변하기 위해 이론을 전취해서 왜곡하고, 부족한 이해로 이론화 작업을 행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것은 지식의 우위 혹은 실천의 우위를 가장한 권위주의에 다름 아니고, 자집단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견강부회이다. 또 말하기 방식에서도 소통을 시도하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강요 - 특히 플로어의 청중을 향해 - 하거나 애매한 답으로 넘어가곤 했다. 결국 연구자들은 서로가 상처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 수준에서 선을 긋고 - 패거리주의, 보신주의, 연구부족 등등의 발로겠지만 - 대중들에게는 강압적인 것이다. 좌파 내부의 지식과 육체의 분할! 왜 좌파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살라’고 강요하는가.


요약하자면 제2회 맑스꼬뮤날레는 제1회보다 수준이 저하되었을 뿐 아니라 일부는 10여 년 전으로 후퇴하였다. 또 그 이론적, 현실적 간극을 폭력적 방식으로 메우려는 좌파문화가 안개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때로 늪에 빠지더라도 길을 찾아가는 작업이 무겁게만 느껴지는 것은 개인적인 감상이길 바란다. 덧붙여 말하자면 분량 관계상 긍정적 면을 더 언급하지 못한 점은 이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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