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호 [교수시론] 이근안과 박정희
2003-03-09 00:51 | VIEW : 5
 
132호 [교수시론] 이근안과 박정희

20년 전, 10월 26일은 유신체제를 만들어 절대권력을 행사했던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에게 저격된 날이다. 16년 동안 권력을 독점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끔찍한 최후는 제3세계 여러 나라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독재자들의 말로와 동일하였다.

  10월 27일, 11년 동안 행방을 모르던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이 자수했다. 그는 독재정권하에서 민주화를 외쳤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과 정의를 위해서 투쟁한 재야 인사들을 고문하여 장애자로 만든 인물로서, 독재정권 아래서 십여 차례 상을 받은 공안담당 경찰관이었다.

  박정희와 이근안은 독재권력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박정희는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위기의식과 공포를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정책들을 펴왔다. 그리고 계엄이나 비상사태는 국민들에게 위기감을 심어줄 수는 있었지만,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을 탄압하기 위하여 이근안과 같은 고문기술자를 필요로 하였다.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독재정권에 도전했던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와 죽음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혹독한 고문이 필요했던 것이다.

  민주주의 하에서 정권의 정당성은 공정한 선거 경쟁을 통해서 확보된다. 따라서, 제3세계 군사독재 국가에서 등장하는 군사정권은 정당성을 내세울 수 있는 목표를 찾아 왔다. 하지만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쿠데타 정권들은 국민의 동의를 통하여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하여 국민의 반대와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보다 조직적인 저항을 제거하기 위하여 민주화 운동을 이끄는 핵심 인사들을 대상으로 고문과 살인을 서슴치 않았다. 즉, 고문 기술자로 불리는 이근안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고문이 정권유지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했기 때문에, 고문은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의 핵심을 구성하는 요소였다. 고문은 군사정권이 당시 잠재적으로는 국민을 대상으로, 명시적으로는 민주화 세력을 대상으로 한 국가폭력의 상징이었다.

  박정희의 죽음은 16년 독재로 인한 국민의 저항과 저항에 대한 대응을 둘러싼 정권 내부의 다툼에서 기인하였다. 하지만 박정희 개인의 죽음과 함께 독재정권과 권위주의 사회체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 유신체제 하에서 제도화되고 조직화된 권위주의 체제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지금도 그 후유증에서 완전하게 자유롭지 못하다.

  이근안 개인도 군사독재의 희생자일 수 있다. 철저하게 독재자들의 권력 유지를 위하여 이근안 개인도 스스로 인간성을 포기하였다. 인간성을 포기함으로써 개인적으로 승진과 포상이라는 독재자들의 선물을 향유할 수 있었다. 이처럼 독재정권은 독재자 자신부터 인간이기를 포기했고, 모든 국민들에게도 인간이기를 포기하도록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민주화 투쟁은 단순히 권력의 정당성에 관한 투쟁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민주화 투쟁은 국민이 인간이라는 것을 표명하는 투쟁이었다.

  이근안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박정희 군사정권 유지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었다. 경제성장과 고문.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키워드가 실제로는 군사독재라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신광영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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