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호 [2001년 상반기 평가-대학원신문 평가] 손 안가는 비싼 밥‘

1석 15찬’의 비싼 밥에 손이 가지 않는 이유

김상철 / 전 대학원신문 편집장

<대학원 신문>은 하나의 유기체다. 신문 위에 활자화된 기사들이 서로 간에 맺고 있는 상호관계에 비추어서 그렇고, 신문사와 원우들이 이루는 유대라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그러므로 신문에 대한 평가는 활자화된 신문과 함께 활자화되지 않는 신문까지도 포괄하는 신문 전체에 대한 평가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떤’ 신문이었나 라는 질문은 ‘누구의’ 신문이었나 라는 질문과 같이 간다.

이런 전제에서 올 상반기 동안 발행된 7호의 신문들을 평가하고자 한다. 먼저 ‘어떤’ 신문이었나라는 물음엔 편집이 어떠했나, 각 기획의 상호연관성과 시의성이 있었는가, 각 면의 특성에 맞는 기사들이 배치되었나 라는 질문 군이 포함된다.
상반기 7차례 발행된 신문에서 우선 눈이 가는 것은 편집이다. 다들 알고있다시피 <대학원 신문>의 면 분할과 편집 프레임은 안정성이 높아 과격한 편집 변화가 여의치 않았다. 그것은 과거의 것이 가지고 있는 우수성을 넘어서는 변화에의 두려움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올 상반기 신문의 파격적인 편집 변화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하지만 답변을 편집 변화의 ‘정당성’에서 찾고자 한다면 쉽사리 손을 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누구의 신문이었나
현행 편집 형식을 보면 1면과 2면이 학내취재와 단신을 담고 있는 ‘학내면’으로 3면이 사회적인 이슈에 주목하는 기본의 ‘사회면’으로 4면과 5면이 학술 기획과 책 소개를 주로 하는 기존의 ‘학술면’이라고 볼 수 있고, 8면이 전통적으로 연구회 소개나 대학원 광고 혹은 원우의 소리를 실었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역시 뚜렷한 변화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존의 ‘문화면’이 어떻게 변했는가가 적절한 편집 변화였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6면 상단은 ‘문화취재’ 3차례, 학술대회 리뷰 등의 학술관계 꼭지로 4차례가 실렸고 그와 하단의 ‘생명과학 맛보기’와 우측 변의 ‘인터넷 속의 풍경’은 고정 꼭지로 채워졌다.
엄밀하게 말해서 ‘문화면’의 기능은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어떤 조류에 대해 ‘딴지’를 거는 기능을 해왔다. 그러므로 기존 문화 매체와의 상관관계를 염두에 두어 기획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아줌마’ 드라마가 유행처럼 번진다고 할 때, ‘아줌마 덕분에 전통적인 지식인이 지니고 있었던 허상이 무너졌다’는 것이 현재의 어떤 문화적 이슈라면, 이에 대해 ‘아니, 이렇게는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식의 기능 말이다.

다음으로 7면은 ‘나의 논문’이라는 꼭지를 통해 최근 본교의 학위 논문을 주제별로 구성하여 싣고 있는데 삼국지의 고사 중 ‘계륵’이라는 말이 평가에 적절하리라고 본다. 의의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왠지 면 낭비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는 의미에서다. ‘낭비’라는 말에 어폐가 있을 줄로 믿지만, 그렇다면 다음의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주길 바란다. ‘누가 읽겠는가? 그리고 논문 소개가 그 필자에게 어떤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가? 수요자인 대학원생들이 이로 인해 어떤 학문적 자극을 받는다고 기대할 수 있는가?’
전반적인 편집변화에 대해 약간 짓궂게 언급하자면, 과거 편집이 지니고 있는 안정성이라는 것은 고작해야 면 분할의 고정성에 의한 것이라 할 때 오히려 새로운 편집에서는 고정꼭지의 대량 편성으로 인한 내용상의 진부함을 분명히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편집자체가 호불호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콘텐츠, 바로 기사의 기획과 내용이다. 이와 관련해 전반적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시의성’이라는 측면이다.

먼저 <대학원 신문>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학내 취재의 경우, 등록금 협상에 관련된 것을 제외하고 6번의 기사는 문제제기의 성격을 띠는 기사로 볼 수 있다. 학내 취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알리는 일’과 ‘해결책을 내놓는 일’이다. 전자에 주목하게 되는 경우는 관련 사실들이 일반 원우들 사이에서 문제시되지 않을 때로 볼 수 있는데, 올 상반기 기사 중에서는 ‘대학강사’에 대한 것이 그 축에 끼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머지 5번의 내용은 전자보다는 후자, 즉 ‘해결책을 내놓는 일’이 무엇보다 요구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도서관 대출 및 반납’에 대한 기사에서는 “적절한 제도적 장치가 요구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의 언급만 있을 뿐 ‘어떤’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 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그러나 두 차례의 계열학생회 및 계열 연구회 평가 기사는 일차적으로 대학원 자치기구내의 적절한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측면에서 높이 살만하다. 아쉬운 것은 이 역시 뚜렷한 대안의 제시가 아니라 문제점들을 나열하는 수준에서 멈추고 있다는 점인데, 오히려 계열체제의 바람직한 전화의 방식이랄지, 연구회 관리를 중앙수준에서 맡는다 할지 등과 같은 전면적인 대안이 제시되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고정꼭지 많아 내용 진부
다음으로 사회면의 시사기획의 경우에는 크게 ‘언론 개혁 리포트’와 ‘가족의 변화’라는 두 개의 기획이 나갔다. 먼저 언론개혁에 관한 기획은 시의성이라는 측면에서 별 무리가 없지만, ‘한국신문의 소유독점과 권언 유착’, ‘왜곡된 광고-판매 구조’, ‘대안언론 운동의 성과와 한계’의 세부 기획에서 기승전결의 일관된 호흡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첫 기사와 두 번째 기사는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너무 평범했으며 이미 다른 통로를 통해서 알려진 사실들의 재탕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세 번째 기사에 주목해 대안제시에 주력했다면 오히려 기사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두 번째 기획인 ‘가족의 변화’는 흡사 사회학과의 학기말 리포트를 보는 기분을 낳는다.
사실 기획의 구성이야 어떻더라도 상관은 없다. 다만 시사기획의 ‘시사성’을 어디서 찾아야 되는지를 보여주지 못하는 기사의 내용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그 외에 3면에 같이 실리고 있는 ‘편집위원들의 세상보기’는 오히려 ‘세상살기’쪽이 어떤가 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대학원 신문>의 특유한 매력인 편집위원들의 글 솜씨를 볼 수 있는 즐거운 꼭지였다.

다음으로 학술기획의 경우에는 ‘근대성의 문제를 다르게 접근하는데 내부/외부, 주체/타자를 경유하는 간접적인 길로서 니시다를 택했다’는 편집자의 말과 “그 (인간의 역사에 깊게 점철되어 있는 폭력성의: 인용자) 뿌리를 보지 않고서는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의 일본 비판은 불가능하다”는 허우성 교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지 않으며, 그것의 이면에 있는 ‘본질주의’ 이데올로기가 오히려 근대성은 물론이고 일본과 우리에 대해 ‘과도한 긍정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우려의 입장을 먼저 말해야겠다. 이에 따라 ‘니시다와 우리’라는 기획 자체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는데, 뜻밖에 기획 의도는 오히려 청탁자들의 글에서가 아니라 편집위원의 ‘넓게 읽기’라는 꼭지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다음으로 ‘대중을 개념짓는다’는 기획은 ‘맑스는 대중에 대해 어떻게 말했나’, ‘대중 속의 문화, 문화 속의 대중’, ‘대중과 지식인의 관계’의 세부 기획에서 보이듯이 각기 독립적인 글들을 모아 놓은 느낌을 받는다. 특히 사상가별 기획이 아니였다면, 맑스의 대중 개념이 왜 기획의 서두를 장식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편집자가 좀더 해명했어야 옳았다. 학내, 시사, 학술 기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불분명한 ‘시의성’과 각 세부기획 사이에서 심심치않게 보이는 ‘단절감’이다.
그럼에도 해당 주제를 선택하는 데 있어 니시다, 대중 개념, 가족 등과 같이 신선한 토픽에 주목했다는 점과 외부 필자의 새로운 발굴이라는 측면은 높은 점수를 주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나머지 고정 꼭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질문으로 평가를 대신하고자 하는데, ‘지도 그리기’는 과연 어떤 지도를 그리고 있으며(154호의 <아랑은 왜>를 둘러싼 상이한 평가는 흥미로웠다), ‘씨줄/날줄’은 어떤 씨줄과 날줄을 보여주고 있는가, 왜 우리는 한 개인의 독서일기를 따라가야 하는가. 더군다나 ‘연구회 탐방’은 과거 ‘브리꼴라주’와 무엇이 달라졌는가.
꼭지명은 단순히 ‘카피’와는 다른 것임에도 하나의 수사로 신문 위를 점령하고 있다. 달라졌는가. 뭐가!

‘사고뭉캄로 역대 신문에서 강조되어 왔던 원우들의 일상적 글을 받는 꼭지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다행이며, 실효에 있어 많은 회의를 낳아왔던 ‘원우의 소리’를 없앤 것도 ‘결정의 어려움’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한 결정이었다.
다시 서두의 질문으로 돌아가, ‘누구의’ 신문이었나 라는 점에 대해 간단히 지적하겠다. 일단 학내 필자 발굴에 있어 어떤 노력도 볼 수 없다.
지난번에 비해서는 신선한 필자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변화라는 것 역시 다른 동심원으로의 이동 외엔 뭐가 특별한가. 눈에 띠는 것은 타 대학원생들의 글이 많다는 것인데, 전문지식이 요구되는 분야의 경우에는 그렇다 치지만 일반적인 내용까지도 외부 필자들을 찾아 쓸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학내 행사에 대학원신문사 편집위원을 찾는 일이 이다지도 힘든 적이 있었던가. 사실 이와 같은 부분은 신문의 가시적인 측면은 아니다.

하지만 주의깊은 사람은 이번 신문들에서 한가지 특징을 발견할 텐데 편집위원들의 글이 그다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점은 그 동안 <대학원 신문>평가에서 ‘편집위원들의 글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점이 크게 지적되어 왔다. 그런 평가의 이면에는 ‘글쟁이’로서 편집위원이 지니고 있는 ‘글 욕심’이라는 개인적 층위의 동기도 있었겠지만, 신문을 통한 대화 상대자를 신문사로 한정하면서 좀 더 자유로운 글쓰기와 신선한 문제제기를 해보겠다는 공동의 결의 같은 것이 있었다.

기획간의 단절감 아쉬워
그러므로 이번 신문들에서 편집위원들의 글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었다는 것은 그간의 평가를 수용했다는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경향과 앞서 ‘왜 학내행사에 참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과 묘한 함수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문사는 대학원 내의 특권 집단도 아니며 고립된 섬도 아니다. 먼저 매체로서의 ‘신문’ 자체가 가지는 성격도 그렇고, 대학원 신문사가 자치 기구로서 지니고 있는 위상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이점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이 없다면, 그의 머리에 든 지식의 양과 그가 지니고 있는 인식의 깊이와는 상관없이, 적어도 ‘편집위원’이라는 이름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대학원 신문>은 특정 모임의 ‘소식지’가 아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원우들의 행사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주는 것은 신문제작 이전의 자세이다. 이 점이 수정되지 않는다면 내용평가는 다 부질없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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