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호 [특집-순서없는 경험의 퇴적물] 기억되지 않는 것들을 위하여

권경우 / 문화평론가



얼마 전 1991년 5월투쟁 10주기 학술심포지움에 참여한 적이 있다. 작년 여름부터 준비한 결과물이었으며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치적, 역사적 의미를 갖는 자리였다. 또한 이번 일은 개인적으로 ‘기억’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91년 5월투쟁’에 대한 가장 큰 문제의식은 다름이 아니라 지난 10년 동안 왜 아무도 말하지 않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왜 기억하지 않는 것인가, 혹은 기억한다 하더라도 왜 ‘잊혀진 기억’이라는 모순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러한 의식은 또한 그 역사적 사실의 복원 못지 않게 기억의 대상이 되는 과거란 도대체 무엇이며 기억의 산물의 하나로 존재하는 역사란 또 무엇인가 라는 화두로 이어진다.
기억과 관련된 또하나의 사건은 올해 동아시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일본 우익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이다. 현재 그 교과서는 일본 시중에서 팔리고 있는데 단 며칠만에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그 교과서의 논리에 모두 찬동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역사 교과서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을 반영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지난 세기 초반의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관련된 기억이다. 이때 기억은 상항에 따라 잘려나가거나 변형, 왜곡되고 만다. 최근 안티조선을 주제로 하는 음반을 낸 ‘디지’라는 랩퍼는 자신의 작업을 바로 그 ‘기억(과거)’에서 찾고 있다. 조선일보의 친일행적이나 정신대 할머니들의 아픔을 지금 기억하지 못하면 미래에는 어떻겠는가 하는 주장이다.
기억은 시간적으로 볼 때 과거 시제를 그 대상으로 한다. 이때 과거는 수많은 얼굴로 떠오른다. 추억, 향수, 역사, 기억, 고향 등등. 그렇지만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과거를 어떻게 불러오는가 하는 호출의 방식이다. 과거를 향수의 대상으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현실적 맥락 속에서 과거를 불러오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둘은 서로의 역할과 효과가 상이한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 과거는 현재를 ‘위로’한다. 지금 아프고, 고통스럽고, 억울하고, 슬프고, 분노가 치미는 이들은 추억과 향수를 통해 위로 받는다.

기억의 과거를 대상으로 한다
그 예로 올해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운 영화 <친구>를 들 수 있다. <친구>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신드롬을 일으켰다. 부산에서는 ‘친구의 거리’를 지정한다고도 하고 촬영지였던 어느 곱창집은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또한 소위 ‘깎두기 머리’로 불리우는 ‘조직들’ 사이에서는 이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쓰게 한다든가, 이제 검사들까지 이 영화를 ‘의무 관람’하고 있다는 후문은, 전국적으로 <친구> 열풍이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오죽했으면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도 보았겠는가. 영화 <친구>가 보여주는 코드는 다양하다. 그렇지만 깡패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나 부산이라는 지역정서의 표출이라는 분석은 차라리 부차적이다. 또한 남성 중심적인 사회를 대변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의 근저에는 ‘과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자리한다. <친구>는 철저하게 과거의 영화이다. 기억의 영화인 셈이다. 그 과거는 실제 경험으로 포장되어 있으며, 그 포장의 내용물은 검은 교복, 회수권 등 다양한 소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무지 칼라 화면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흑백의 톤으로 처리된 학창시절은 아릿한 기억을 되살려놓는다. 그 화면을 응시하는 수많은 관객들은 잠시 자신의 현실적 조건과 상황을 잊는다. 단지 과거를 부분적으로 기억할 뿐이다.
현실을 잊는 것은 일종의 탈주이다. 이때 탈주는 두 가지 방향을 갖는다. 과거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방향이 부정적이라면 미래를 모색하고 상상하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크린 속의 <친구>는 현실과 전혀 소통하지 못한다. 그것은 현실의 어떤 문제도 건드리지 못한다. 단지 잠시 과거로의 여행에 사람들을 초대할 뿐이다. 그래서 <친구>는 화면 위에 과거를 적어놓은, 그려놓은, 뿌려놓은 ‘추억’의 영화이다. 이때 추억은 기억과 구별된다. 둘 다 과거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추억은 시간적으로 하나의 단면이며 기억은 퇴적의 산물이다. 추억의 시선은 과거의 특정한 시기에 머물러 고정되는 반면, 기억은 현재의 프리즘으로 축적된 기억들을 길어올린다. 그래서 기억은 지금 이곳과 교접한다. 추억은 우연적이지만 기억은 필연적이다. <친구>는 그냥 갑자기 떠오른 기억의 일종, 즉 추억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친구>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은 역사적 퇴행의 증거이다.
기억에 있어서 퇴행인가 생성인가의 문제는 과거를 불러와서 되새기는 방식에서 구별된다. 영화 <친구>는 과거를 새롭게 쓰거나 해체하지 않는다. 과거는 과거의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친구>에서는 아편과 같은 중독을 맛보게 된다. 현실에서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중독 또한 강해진다. 그래서 중독은, 대부분의 마약이 그렇듯이, 도피의 일종이다. 이렇게, 복고는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복고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경향이다. 그것은 향수(nostalgia)의 구체적인 발현이며 동시에 향수의 물화 형태이다. 복고는 더 이상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발길을 뒤로 돌리게 한다. 그 밑바닥에는 “그래도 옛날에는 살기 좋았다”면서 회한이 똬리 틀고 있다. 폭력이 난무하는 지극히 ‘엽기적인’ 세상에서 복고의 얼굴은 따사롭고 아름답기만 하다. 복고에는 아름다운 시절만 편집되어 있다. 그 얼굴은 식민 시대의 근대 일본이거나 박정희의 개발독재이며, 전두환의 카리스마와 김영삼의 문민독재로 어느 새 탈바꿈한다.
과거는 그리움이자 ‘추억’이다. 추억은 가슴에 남는다. 그래서 따뜻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 추억은 단지 따뜻하게 ‘포장되고 덧입힌’ 추억일 뿐이다. 그래서 현재 나타나고 있는 복고문화는 아름다운 추억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을 봉합하고 유지하는 역할만을 할 따름이다. 그것은 이 시대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생산하면서도, ‘진부한 것’을 상품화하는 역설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망각·왜곡·변형·삭제
기억의 반대편에는 망각이 자리한다. 망각은 경험에 대한 부인이며 저항을 가리킨다. 하지만 기억과 망각은 상호 관계한다. 완전한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기억은 망각을 전제하며 이때 망각은 기억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새롭게 등장하는 기억을 위해 우리의 뇌는 망각을 주도한다. 그래서 한 기억의 자리는 어쩌면 다른 기억을 밀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기억은 순수하기보다는 왜곡되고, 변형되고, 심지어 삭제되기도 한다. 기억의 왜곡이나 변형은 부분적인 망각에서 비롯되며, 삭제는 전체의 망각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은 복원이면서 동시에 흔적이기도 하다. 복원이라는 측면에서는 반복하는 것이지만 흔적은 그림자를 뜻한다. 일종의 유령(specter)이라는 말이다. 복원은 퇴행이라는 결과를 낳고, 흔적은 생성의 길을 택한다. 완전한 기억이란 없다는 사실은 기억의 복원이 허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복원은 새로운 것을 만나려고 하기보다는 과거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이 순간 나타나는 것은 편집증이다. 편집증은 기억과 망각의 불균형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기억은 흔적이라 했다. 흔적은 상처를 끌어안고 있다. 따라서 기억은 상처이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이다. 그런데 기억의 반동적인 현상, 이를테면 추억이나 복고는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봉합할 뿐이다. 지금 이 순간도 생겨나는 또 다른 상처들마저도 봉합하기 위해 뛰어다닌다. 80년대는 그러한 기억을 표상한다. 하지만 그 기억은 얼마나 일면적인가. 얼마나 편집증적인가. ‘386 세대’라는 숫자에 시민들은 또 얼마나 속았던가. ‘4·19세대’라는 말이 그랬듯이. 80년대에 대한 과도한 기억은 90년대의 열정과 성실을 묻어버리기에 충분하다. 단언컨대, 80년대는 오히려 ‘기억되지 않은 사람들, 사물들, 사건들의 시대’다.

흔적으로서 기억과 기억의 정치학
기억은 경험의 퇴적물이다. 하지만 기억의 퇴적물은 순서가 없다. 적어도 기억에 있어서 시간은 의미가 없다. 필요에 따라 조건에 맞는 기억을 끄집어낼 뿐이다. 그것은 하나일 수도 있고, 여럿일 수도 있다. 기억은 홀로 존재하고 다른 재료가 있을 때에만 표상된다. 표상되는 기억은 또한 일면적이거나 중층적이다. 하나의 단면으로만 표상되는, 즉 일면적 기억은 편집증의 형태이며, 동시에 추억에 속한다. 중층적 기억은 과거의 현재적 의미를 질문하고 찾아가는 과정의 토대이다. 다양한 경험의 물질이 쌓여 만든 기억의 퇴적물은 무늬를 형성한다. 무늬는 언제 순열과 조합이 가능한 배치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의 배치는 사적이지만 동시에 집단적이다.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홀로’가 아니라 ‘서로’일 때 가능하다.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기 전 우리의 기억은 무의식의 창고에 자리잡고 있다가 어느 새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처럼 기억은 집단적인 공통의 경험을 뜻한다. 공통경험을 기억하는 집단이 많을 때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의 역사는 기억의 심한 불균형 상태라는 점에서 이 땅에 사는 이들은 모두 편집증 환자일 뿐이다. 공통경험은 항상 추억에서만 존재하며 현실에서는 삭제되고 만다.모든 기억은 말(言, speech)이다. 말하지 않은 것은 기억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그래서 지배는 항상 말에서 출발했다.
슬프지만, 정말 슬프지만 기억 속에는 추억과 복고의 자리가 크다. 그것은 흔히 생각하듯이 망각 때문이 아니다. 기억과 망각은 서로가 대립하지만 상호보충적이다. 중요한 것은 ‘기억되지 않는, 기억되지 못한 것들(things)’을 기억하는 일이다. 이는 흔적을 만드는 일이며 편집증을 치유하는 길이다. 그것이 바로 기억의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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