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호 [특집-기억3/문학] 기억되지 않는 것들을 위하여

오창은 / 국어국문학 박사3차

시간은 기억을 통해 재구성될 뿐이다.
최윤의 소설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의 초반부는 우리가 불현듯 과거와 만나게 됐을 때 보일 수 있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기억)가 당신에게로 다가오더라도 걸음을 멈추지 말고, 그녀(기억)가 지나간 후 뒤를 돌아보지도 마십시오.(중략) 설령 당신이 그렇게 한다고 해도 수많은 소녀들(기억들)이 당신을 쫓아와 오빠라 부를 것(주체를 호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윤의 소설에서 그녀는 ‘광주’이고, ‘아픔’이고, 모두가 깊숙히 간직하고 있는 부끄러움이다. 이런 측면에서 ‘기억’은 ‘망각’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문학 작품은 근본적으로 주체(작가)가 경험한 개개의 순간을 통합하여 어떤 종류의 통일체(텍스트)를 구성하는 작업이다. 문제는 작가의 기억이 아니라 ‘기억’이 어떻게 가공되느냐이다. 기억은 결국 시간성과 연관된 의미이며, 재구성의 대상이다. 한스 마이어 호프는 기억의 구조에 대해 “기억은 창조성에 의해 통일된 자아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기억의 구조가 창조성과 상상력의 종합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는 1990년대 문학에서 기억에 대한 창조성과 상상력이 어떻게 전화 되었는 지를 목도하게 된다. 신경숙과 김소진은 과거에 대한 자아의 기억 방식을 급격하게 전환시킨 작가들이다.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와 김소진의 ‘자전거 도둑’은 기억의 주체를 ‘집단’에서 ‘개인’으로 전환시켰다. 개인의 기억에 의존해 내면의 세계를 ‘시간’을 재구성했다. 신경숙과 김소진은 ‘감수성의 혁명’의 주역이었으며, 1990년대 문학작품의 기억의 구조를 변화시킨 ‘상상력의 아방가르드’였다.

문학 작품에서 기억은 ‘공간’이 아닌 ‘시간’을 문제 삼는 작업이다. 따라서 문학작품에 나타난 기억의 구조는 ‘나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갗(과거)라는 물음에서 출발해 ‘우리는 무엇을 생성시킬 수 있는갗(현재·미래)라는 질문으로 나아간다. 직접적인 기억과 연관된 성장소설들(예를 들면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성석제의 ‘첫사랑’, 이순원의 ‘19세’ 등등)은 ‘과거’를 이야기하면서도 현재와 미래를 위한 ‘나아가기’ 방식을 취하고 있다. 문학 작품이 담고 있는 기억의 작동방식은 과거에 대한 민속지학(ethnography)적 기술이 아니다. 베르그송의 이야기를 전유해서 표현하자면 ‘문학 텍스트는 시간의 지속, 생성과 변화를 담아내는 작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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